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98>율곡사업 앞두고 합참 대대적 개편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7
제1話 溫故知新<98>율곡사업 앞두고 합참 대대적 개편

1973년 4월 이병형(李秉衡·육사4기·중장 예편·작고)본부장으로부터 독자적인 군사전략 방안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지침 중 하나는 합참을 각 군을 통할, 자주적 군사전략과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할 조직으로 개편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해 5월 합참은 대대적으로 개편하게 된다. 인사국·군수국 같은 기존의 국(局)들이 이때 없어지고 작전국의 한 과(課)에 불과하던 전략기획과는 전략기획국으로 확대, 개편된다. 전략기획국에는 선임과인 전략1과와 군구조과 등 4개 과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소장 예편)전략기획과장은 전략기획국의 전략1과장이 됐다. 이렇게 해서 합참에는 한신(韓信)합참의장-이병형 본부장 밑에 전략기획국(이재전), 전략정보국(윤흥정) 동원국, 지휘통신국 등의 ‘전략’이라는 이름을 단 부서가 생겨났다.

내가 전략기획국장으로 부임한 것은 율곡사업 초안이 제79차 합동참모회의(74년 2월16일) 심의에 부쳐지기 이틀 전인 2월14일이었다. 초안이 합참에서 통과되자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이 남았는데 그에 앞서 사전 정지작업으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는 임대령과 함께 최광수 국방부차관, 오원철 경제2수석, 김용환 경제1수석, 남덕우 재무부장관, 태완선 경제기획원장관, 김종필 국무총리를 차례로 찾아 보고하고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그때 한 경제부처 장관이 한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군은 외화를 단돈 1달러라도 아껴 써야 한다”면서 우리에게 “달러가 어떻게 번 돈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우리 국민들 머리 자르고(가발 수출) 모래·자갈 파서 번 돈이니 한푼이라도 허투루 쓰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합참에 가서 율곡사업과 관련해 수행한 첫 업무는 ‘전력증강 8개년 계획’ 초안을 입안한 임과장에게 코드네임(암호)을 만들어 제시하라는 지시였다. 아이디어 공모에 상금도 걸었는데 결국 임과장이 낸 ‘율곡’과 ‘아사달’ 중에서 율곡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이병형 장군은 무릎을 치며 이 코드명을 반겼고 이어 한신 합참의장을 거쳐 박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날이 다가왔다. 대통령 또한 ‘율곡’이라는 이름에 흡족해했다.

그리하여 나는 전략기획국장으로 부임한 지 10여 일 만인 74년 2월25일 박대통령을 모시고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4시간 동안 전력증강 계획에 대해 보고하게 됐다. 이 자리에는 각 군과 합참, 그리고 국방부는 물론 국무총리·부총리·재무부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다.

다만 전날 진해에서 터진 해군 YTL(예인선) 사고 수습 때문에 김규섭(金圭燮·해사2기·대장 예편)해군참모총장이 못 오고 참모차장이 대신 참석했다. 당시 해군과 해양경찰대원 316명을 태운 YTL정이 운항 부주의와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충무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316명의 젊은 수병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으나 이중 절반이 넘는 159명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됐다. 이 사건은 아직도 전시(戰時)가 아닌 해군사고로는 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낸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무튼 합동참모회의에서도 해군은 대함주의(大艦主義) 원칙에 입각, 큰 배를 선호해 합참과 논란을 벌였는데 ADD 보고에서 박대통령이 “해군의 대함주의 계획은 천천히 해도 된다”면서 뒤집힌다. 그러나 대함주의를 고집한 해군의 구축함 등 도입 계획이 ‘고속정 90척 국내 건조’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합참의 안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됐다. 김규섭 총장은 얼마 후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