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100>율곡사업과 美 슐레진저 장관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8

제1話 溫故知新<100>율곡사업과 美 슐레진저 장관

1975년 7월 방위세가 신설, 율곡사업의 재원이 됐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의 말대로 어지간한 무기는 국내생산이 되고, 국내생산이 안되는 것은 미국에서 들여오는 수밖에 없는데 미국이 탱크·잠수함·공격헬기 등 공격무기는 한국에 팔 수 없다고 나온 것이다. 당장 공군의 F-4 팬텀기 도입계획부터 차질을 빚었다.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미국이 이미 7사단을 철수한 시점이었다. 박대통령은 미군이 단계적으로 한국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벼락 치듯 화를 냈다. 한·미 합동작전과 무기체계의 호환성을 감안할 때 당시로서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무기를 사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박대통령은 75년 8월 서울에서 열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를 앞두고 뉴욕 타임스와 회견하게 된다. 주로 한·미동맹과 안보현안에 집중된 이 인터뷰에서 박대통령은 “한국군이 독자적인 전력증강계획을 추진 중인데 4∼5년 후에는 미 지상군이 한국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미 지상군은 한반도에서 나가도 된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기나 팔아라”라고 폭탄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과연 박대통령다운 배짱이었다.

이 무렵 한국 정부는 미국에 전력증강계획의 대강을 알려주고 지원(판매)을 요청한 상태였다. 박대통령의 NYT 회견 내용을 몰랐을 리 없을 제임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그해 8월27일 SCM 참석차 한국에 와서 유명한 만찬 연설을 하게 된다.

슐레진저는 “주한미군은 한국방어만을 위해 주둔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으로서는 사활적인 이해관계(vital interest)가 달린 문제이므로 한반도에 계속 주둔한다. 그러니 나가라고 하지 말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한국이 추진 중인 율곡계획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슐레진저의 이 말은 한국에 무기를 팔겠다는 뜻이었다. 당시만 해도 ‘율곡’이라는 코드 네임은 사실 미국에도 비밀이었다. 그런데 슐레진저는 이미 코드 네임을 알고 있었다.

다음은 기억에 남아 있는 연설의 요지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조선에 율곡이라는 위대한 분이 있었다. 이 분은 국방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국방능력이 의지를 뒷받침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한 위대한 철학가이자 전략가다. 율곡은 국방은 의지만으로는 안되고 능력(군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10만 양병론을 주창했다.

그로부터 200년 뒤 미국에 조지 워싱턴이라는 위대한 분이 계셨다. 그는 율곡 선생과 같은 생각, 즉 국방의지가 능력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로부터 200년 뒤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박대통령을 극찬한 슐레진저의 ‘200년 주기’ 연설은 1∼2주 전에 실린 NYT 인터뷰를 다분히 의식한 것이었다. 때로는 이처럼 초강수가 더 효과적인 때도 있다. 그 점에서 박대통령은 탁월한 군사전략가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당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느라 공업지구와 항만시설 방어를 위해 북한의 전투기 공습에 대비한 방공체제를 반영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ADD)에는 유도탄 개발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또 미국이 함대함 미사일을 팔지 않자 사상 처음 미국 아닌 제3국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결단을 단행했다. 이 밖에 전차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합참이 건의한 것을 수용했다.

이처럼 박대통령의 생각은 많은 부분에서 합참과 일치했다. 박대통령은 이에 앞서 율곡계획이 입안되자 74년 2월께 정부예산이 반영되지 않은 상황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그자리에서 불요불급한 8000만 달러를 긴급 수혈, 74년부터 율곡사업을 착수할 수 있게 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