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101>‘율곡’ 2차 수정보고 朴대통령 극찬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9

제1話 溫故知新<101>‘율곡’ 2차 수정보고 朴대통령 극찬

1차 율곡계획이 착착 진행되던 1975년 여름 어느 날 서종철(徐鐘喆)국방부장관(1973년 12∼77년 12월)이 나를 찾았다. 율곡사업 집행단장인 백석주(白石柱·육사8-4기·대장 예편)군수차관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2차 율곡계획을 보고했는데 퇴짜를 맞았다면서 한 달 뒤에 다시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내게 보고를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정렴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한 달 뒤 배석하는 각군 총장에게 소관계획을 일일이 따질 테니 철저히 준비해서 들어오라”고 사전 경고까지 했다는 말도 전했다.

과제를 받아들고 곰곰이 따져보니 대통령에게 퇴짜 맞은 보고서에는 율곡사업과 관련, ‘무엇이 왜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개념 정립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보고할 차트를 두 개 준비했다. 하나는 남북한 전력 격차가 생긴 원인과 이유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같은 차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율곡계획 초안을 작성한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소장 예편)전략1과장에게 두 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하나는 우리의 예산기획 절차· 개념 등을 먼저 대통령에게 설명해 드려야겠다, 그냥 무조건 무기구입에 얼마가 필요하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왜 피아(彼我)간에 전력 격차가 생겼나, 격차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다루겠다는 것이었다.

임 전 국가정보원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재전 장군의 지침에 따라 모든 기안을 내가 했다. 당시 차트로 보고했는데 그 차트에 처음으로 그래프가 등장했다. 남북한의 전력증강 현황을 60년대부터 죽 비교해 탱크면 탱크, 전투기면 전투기, 이런 식으로 증가 추이를 그래프로 비교하고 국방비 증가 추이도 비교했다. 이 차트를 갖고 이재전 장군이 청와대에서 박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및 각료들, 김정렴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 합참의장과 각군 총장 등을 모시고 2차 율곡계획 수정보고를 했는데 결과는 대히트였다. 보고 내용에 흡족해한 박대통령은 ‘이재전 장군, 혹시 브리핑 노트를 여분으로 갖고 있느냐’면서 보고서를 한 벌 달라고 할 정도였다. 이장군은 그때 대통령의 칭찬을 많이 받고 한두 달 뒤 중장으로 승진해 군단장으로 나갔다.”

박대통령은 기분이 좋으면 풀 네임을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이날도 박대통령은 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이재전 장군, 혹시 브리핑 노트를 여분으로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자리에는 쓰고 있는 이 브리핑 노트밖에 없지만 필요하시다면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고 보고했다. 이때 나를 잘 보았기 때문인지 박대통령은 얼마 뒤 나를 경호실 차장으로 불러들였다.

대통령이 자리를 뜨자 김정렴 비서실장은 “실은 대통령께서 단단히 벼르셨는데 워낙 이장군이 이해하기 쉽게 논리정연하게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아주 만족하게 생각하셨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잔뜩 긴장했던 각군 총장들과 합참의장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초기 율곡계획의 창시자는 이병형 합참본부장이었다. 한신 합참의장은 이러한 이장군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그리고 임과장은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기본계획 작성 및 집행단 연결을 전담했으며, 나는 기본계획을 발전시키는 데 조금 참여하고 율곡사업 2차 수정안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뿐이다. 나중에는 유병현 장군이 본부장으로 와서 대미 협조업무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 밖에 ‘율곡’하면 빼놓을 수 없는 민간인은 오원철 경제2수석(중화학공업 담당 비서관)과 최광수 국방부차관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율곡사업의 입안 및 집행을 재가하고 외화 지불의 세세한 부분까지 따져 헤아린 박대통령이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