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103>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화이트보스 2009. 5. 18. 20:40
제1話 溫故知新<103>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돌이켜보면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수많은 군사적 충돌 위기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68년 1월23일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69년 4월15일 미 해군 EC-121 전자정찰기 격추사건 ▲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 등이다.

당시 푸에블로호에는 미 해군장교 6명과 병사 75명, 민간인 2명 등 83명이 타고 있었고 EC-121 전자정찰기에는 미 해군장교·병사 30명과 미 해병 1명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두 사건 모두 처음에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거듭된 핵전쟁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미국의 굴욕적 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나 판문점 사건은 달랐다.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은 76년 6월 한·미 간의 첫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실시 후 두 달 만인 8월18일 미군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 있는 미루나무를 베려다 이를 제지하려는 북한 측 군인들과 다툼이 벌어져 보니파스 대위 등 미군 경비장교 두 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은 사건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경비대대를 지칭하는 ‘캠프 보니파스’는 그때 희생된 보니파스 대위를 기린 것이다.

사건이 나자 미국은 즉시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주재로 백악관 상황실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그 몹쓸 놈(the God damn thing)의 나무를 잘라버리고 만일 북한군이 또다시 방해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강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F-111 전폭기·F-4 팬텀 비행대대가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됐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앞세운 전투선단이 동해에 출동했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1800명이 포함된 미 지상군 1만2000명에 대한 출동명령도 내렸다. 주한미군 측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포대를 비무장지대를 따라 배치했다. 8월20일부터 핵무기를 실은 B-52 폭격기가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출격, 한반도 상공에서 전속력으로 북상하는 위협비행을 감행하는 등 전면전이 벌어질 위기감이 조성됐다.

당시 스틸웰 주한 유엔군사령관과 쿠시맨(Cushman·한국명 구수만) 한미1군단 집단사령관은 백악관의 이런 결정과 상세한 작전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고 보고했다. 그러나 최종보고를 마치고 작전병력을 배치한 후에도 불안했던지 쿠시맨 장군은 6군단장인 내게 적이 어떻게 나올지 물어왔다. 나는 “작전의 보안만 유지되면 적은 아무 대응도 강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예상대로 북한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작전 종료 후 쿠시맨 장군은 다시 나를 찾아와 절단한 미루나무 토막으로 만든 기념패를 주면서 “북한군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공산당은 위에서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경직된 체제이기 때문에 보안을 유지해 기습공격하면 상부의 지시가 없어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북한의 대응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대응했다면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작전 때 한·미군에는 6·25전쟁 후 처음으로 ‘데프콘 2’가 발령됐다. 당시 미군은 74년부터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 위한 전진방어전략인 ‘홀링스워스(Hollingthworth) 계획’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B-52 전략폭격기의 전면적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개성~연백을 장악하는 것을 골자로 한 홀링스워스 전임 한미1군단장의 ‘7일 작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8월21일 새벽에 개시한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김일성은 다음날 인민군사령관 자격으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스틸웰 사령관에게 보내왔다. 이로써 전쟁 없이 결말이 났지만 그때 북한의 대응으로 미군의 작전계획이 실행됐다면 우리의 희생도 컸겠지만 한·미 연합군이 개성~연백지구를 점령, 휴전선과 근접한 수도 서울의 취약점이 상당 부분 해소됐을지도 모른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