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9년 10·26 사건을 계기로 이 국가원수 시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全斗煥·육사11기·대장 예편)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조사를 받고 육군 교도소 ‘남한산성’에 갇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0·26 당시 육사11기를 주축으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멤버들은 이미 군내 요직에 포진하고 있었다. 우선 경호실만 해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동기인 노태우(盧泰愚)소장이 전씨의 후임 작전차장보(10·26 이후 9사단장)로 있었고, 전씨의 동생 전경환씨는 경호계장으로 근무했다. 또 전씨의 심복인 장세동(張世東·육사16기·중장 예편)대령은 청와대 경비를 책임진 30경비단장이었다.
시해범인 김재규(金載圭)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현장검증이 끝난 뒤 어느 날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전화를 했다. 10·26 당시 상황에 대해 확인할 사항이 좀 있는데 합수부 사람들이 청와대 경호실에 가면 이런저런 소문이 나니 직접 중정이 관리하는 궁정동 사무실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못갈 이유가 없었다. 나는 궁정동 정보부 안가의 여러 방 중 한곳에서 현직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쪽 말로는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형식적인 조사’를 마치고 집 대신 남한산성으로 직행했다.
죄목은 직무유기였다. 국가공무원법에만 있는 이 직무유기는 의도적으로 직무를 유기할 목적으로 그 자리를 비우거나 회피한 행위에 해당하는데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수감해 놓고도 어떻게 법적용을 해서 사법처리할지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그래서 곧 내보내주겠지 했는데 20여 일이 지났는데도 내보내줄 눈치가 안 보였다.
나는 “법적 구속연한이 있을 터인데 현역 중장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이렇게 가둬 놓을 수 있느냐”면서 “나를 내보내주지 않으면 파옥하고 걸어서 나가겠다”고 교도소장에게 항의했다. 당시 교도소장은 마침 내가 6군단장 시절 헌병참모로 데리고 있던 후배였다. 교도소장이 상부에 보고했는지 나는 곧바로 나올 수 있었다. 남한산성 수감자가 정장을 입고 간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나온 것은 내가 교도소 창설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일 것이라고들 했다.
나는 10·26을 거쳐 12·12로 가는 그 길목에서 남한산성을 나와 군복을 벗었다. 국가정보기관의 책임자가 국가원수를 시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청와대에서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육사5기·대장 예편)육군참모총장에게 몇 가지 조언하고 경호실 선임 책임자로서 자진해 책임지고 군복을 벗었다. 나는 49년 육군소위로 임관한 지 꼭 30년 만인 79년 12월 예비역으로 편입됐다.
마지막으로 핸슨 E 볼드윙의 경구(警句)를 인용해 어느덧 105회를 끌어온 ‘온고지신’을 끝낸다.
“군은 강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전능해서는 안된다. 군은 영향력을 가질 필요는 있다. 그러나 지배해서는 안된다.”
<정리=김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 제1화 ‘온고지신’이 105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온고지신’을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 제2화는 1947년 2월 창설된 국군의 전신 국방경비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해 83년 10월31일 육군소장으로 퇴역하기까지 33여 년간 파란만장한 군 역정을 거친 최갑석 장군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200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