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서울 필동 시절의 합참을 ‘양로원’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내가 1974년 초 한·미 1군단 부사령관직을 마치고 합참전략기획국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만 해도 사람들은 합참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연합참모본부로 출발한 합참은 더 이상 양로원이 아니었다. ‘필동 양로원’에 가니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건국 후 처음으로 자주국방의 기초를 세우는 전력증강사업이었다.
각군에서 파견 나온, 보직이 마땅찮은 고급장교들이 장기나 두던 합참에 자주국방이라는 과제가 떨어지니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군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전략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으로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건 영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자주국방을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했다. 자주적 전략개념과 자주적 무장능력, 그리고 작전 지휘권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군은 당시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군의 무장능력은 전적으로 미국의 군원(軍援)에 의존했고, 작전계획도 유엔사의 작계 2058뿐이었다. 당시 한국군에는 전략 단위 문제를 다룬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자주국방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이 생소하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말 자체가 낯설었다. 그런 것을 다룬 책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합참에서 그런 경험을 한 나는 행운아였다.
나를 합참전략기획국장으로 보낸 것은 서종철(徐鐘喆·육사1기·대장 예편)국방장관이었다. 서장관은 1군사령관 시절 나를 1군 작전참모로 휘하에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한·미 1군단 부사령관 자리에 4년 동안 ‘붙박이’로 있던 나를 불러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내가 부임하기 전 C장군(육사6기·소장 예편)이 잠깐 근무했으나 나와 맞바꿨다. C장군은 포병 출신으로 영어에도 능했으나 서장관은 C장군이 그 당시 처음으로 생긴 ‘전략’ 업무를 다루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합참에 가서 내가 율곡계획(栗谷計劃)이라는 한국군 최초의 자주국방을 위한 전력증강계획을 박대통령께 보고하는 ‘행운’을 안은 것은 이병형(李秉衡·육사4기·중장 예편·작고)본부장 밑에서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소장 예편)군사력소요과장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얻은 덕분이었다. 당시 합참은 홍릉에서 비밀리에 해병대사령부 해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해병대의 합참에 대한 테러가 있었다. ‘필동 호랑이’로 통한 이본부장이 “이놈들 다 죽인다”며 나서서 해병대를 제압한 기억이 생생하다.
전력증강8개년계획을 기안한 임과장은 내가 합참 근무를 마치고 75년 중장으로 진급, 6군단장(1975∼77년)으로 근무할 때도 예하 사단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하는 인연을 맺었다. 사실 나는 율곡계획과 관련해 자주국방의 개념정립과 전략기획 구조·기능 등에 대한 지침만 주었지 실무적인 업무는 임과장이 도맡아 했다. 임과장은 내가 지침만 주면 ‘작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가 만든 율곡계획 보고서를 갖고 박대통령에게 1, 2차에 걸쳐 보고했다. 상하관계에서 이런 이름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우리 세 사람은 합참시절 일로써 인연을 맺은 ‘율곡 3총사’였다.
당시 북한군과 비교할 때 지상군의 병력 규모는 별로 뒤지지 않았지만 해·공군의 장비는 매우 뒤떨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에 따라 해외주둔군은 고도의 첨단 장비로 무장한 해·공군 위주로 배치하되 머릿수가 많이 필요한 지상군은 현지 ‘원주민’군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국의 군원 예속 하에 그런 가분수 구조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전력증강8개년계획으로 출발한 율곡계획은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순전히 우리 힘으로 전력을 증강하려는 야심찬 출발이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