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 <191> 막걸리철학 -86-

화이트보스 2009. 5. 20. 17:05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 <191> 막걸리철학 -86-

박정희 대통령과의 네 번째 만남은 1976년 육군 원호관리단장 시절이다. 육군 PX 관리 개선을 단행하면서 육본 연병장에서 시설 장비 운영 방법을 전시하던 때다. 이때 박대통령이 이세호 육참총장을 대동하고 직접 전시장을 찾았다.

그때 나는 PX에서 불결한 막걸리를 판매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거슬렸다. 찌그러진 양푼이나 주전자에 쭈그러진 양재기 술잔, 그리고 지저분한 드럼통에 담긴 막걸리. 이런 것이 마땅치 않아 알루미늄통에 유리컵을 사용하고 주전자를 없애는 대신 포트에 넣어 막걸리를 유리잔에 따르도록 그릇부터 우선 바꾸었다.

장병들의 위생을 생각해 이같이 개선했노라고 자신 있게 브리핑하는데 대통령은 엉뚱하게 이렇게 말했다.

“막걸리는 말이야.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아 이가 빠졌더라도 무수한 사람의 입이 스쳐간 낡은 사기그릇에 부어 마시는 것이 제격이야.”

웃으면서 말하는 이 한마디에는 바로 박대통령의 철학과 인생관이 녹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히 감동했다.

이때도 대통령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옛날 사연을 꺼낼 만큼 시간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도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데 이미 그런 말을 할 시기는 지나버린 것이다.

다음 인연은 79년 8월 중순 8사단장(소장)으로 복무하던 때다. 대통령이 시해되기 불과 3개월 전, 육사 생도였던 외아들 지만군이 하계 병영훈련을 8사단에서 받는다는 통고가 오고 경호실에서 대통령이 직접 훈련받는 지만군을 면회할 것이라고 알려 왔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모처럼 사적인 자리가 되겠거니 여기고 옛 회포도 풀 여러 가지 담소거리도 생각해 두었다. 아내를 비롯, 영관급 장교 부인들을 참여시켜 음식 나르는 법을 익히고 시설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단장실에서 면회가 이뤄지도록 일정이 변경돼 버렸다. 무엇보다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눌 기회가 불발된 것이 두고두고 섭섭했다(후에 경호상 문제가 있다며 군단장실 면회도 취소됐다).

마지막으로 박대통령을 대하게 된 것은 79년 10월 말, 대통령의 생존 모습이 아니라 시해 현장을 본 것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된 직후 나는 보통군법회의 육군 심판관으로 임명돼 ‘최후의 만찬장’인 궁정동을 현장 검증했다. 시해 현장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최후를 맞을 분이 아닌데…’ 하는 비통한 아쉬움과 인생무상을 느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한 것을 보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견디기 어려웠다.

김재규는 박대통령과의 관계를 늘 자랑 삼아 말하곤 했다. 67년 10월 내가 5사단 포병사령관(대령)으로 있을 때 무장 간첩 3명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적이 있다. 이때 보안사령관이던 김재규 중장이 격려차 헬기를 타고 부대를 방문했다.

강창성(육사8기·보안사령관·국회의원 역임)사단장, 각 연대 포병사령관·연대장·대대장급 간부들과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김사령관이 박대통령과의 각별한 관계를 소개했다.

“사단장과 연대장 사이가 가장 가까워야 합니다. 박대통령이 5사단장으로 계실 때 나는 35연대장으로 있었소.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연대 병기 창고에서 화재가 나 연대의 주요한 병기가 모두 타 버리고 말았소. 이제 나는 옷 벗을 일밖에 없다고 낙담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단장으로부터 호출 명령이 떨어졌소.”

김재규는 박사단장 앞에 나가 “각하, 죄송하게 됐습니다. 큰 사고를 내 책임지고 연대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하고 고개를 떨궜다.

<정리=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