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연대장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 사단장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김재규는 무섭게 흐르는 침묵이 두려워 “각하, 제 불찰을 질책해 주십시오”하고 거듭 용서를 구했다. 이윽고 박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사단장은 현관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 뒷좌석에 김재규를 타라고 하고 자신이 앞좌석에 타더니 운전병에게 “가자”하고 명령했다. 지프가 산골짜기로 들어서자 김재규는 혹시 권총으로 쏴 죽이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지프는 사단장 공관으로 들어섰다. 박사단장을 따라 공관 거실로 들어서자 박사단장이 한쪽 벽 선반에 있는 양주병 중 조니 워커를 꺼내 마개를 따더니 맥주잔 두 개에 가득 따랐다.
“마셔.”
김재규는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러나 죄인인지라 억지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니 워커는 맥주잔으로 넉 잔이 나왔는데 박사단장이 첫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자 김재규도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박사단장이 다시 빈 잔 두 개에 술을 채웠다. 박사단장이 “마셔” 하고 또 잔을 내밀며 건배를 제의했다. 김재규는 잔을 부딪친 다음 삼켰다가 뱉었다가 하며 두 번째 잔을 비우려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깨어 보니 깜깜한 밤중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사단장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겁을 먹고 엉금엉금 부관 방으로 갔다. 그런데 부관은 없고 그 방에 박사단장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대신 부관은 취사반장 방으로 갔고 취사반장은 취사병 방으로 가서 취사병과 함께 자고 있었다. 김재규는 냉수를 한 사발 들이켜고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대신 화장실에서 새벽까지 계속 토했다.
아침이 되자 박사단장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조반상 앞에서 그에게 또 해장술로 양주를 맥주 컵에 따랐다.
“입을 떼지 말고 마셔.”
밤중에 똥물까지 토해 냈는데 또 마시라고 하니 그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또 마셨다. 그때까지도 박사단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마 후 참모장이 공관으로 들어왔다.
“각하, 모든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러자 박사단장이 김재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대장은 가 봐!”
그제서야 김재규는 ‘이제 옷을 벗고 나가라는 것이로구나’ 체념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그러자 사단 참모들이 도열해 있고 군악대가 연주하며 그를 맞이했다. 김재규는 ‘이임 환송 행사로구나’ 여기며 연대장실로 들어섰는데 대기하고 있던 군수참모가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이번 화재 사고로 소실된 장비가 많습니다만 소총·기관총·박격포·무전기 손실분은 각 연대와 타 부대의 원수(原數) 외 지원으로 충당됐고 기타 소소한 장비는 동대문 시장에서 구입해 와 채워 놓았습니다. 병기고는 밤새 전 장병이 동원돼 깨끗이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이 보고를 받고 김재규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리고 말았다.
“처벌받아 마땅한 나를 사단장 각하는 이렇게 배려해 주셨습니다. 백골난망, 이 은혜를 입고 사나이로서 목숨 바쳐 충성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마침내 그 충성의 기회는 왔다. 1972년 10월 유신 때 계엄령이 내려지고 9사단장으로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를 받아 서울지구 계엄군으로 출동했다. 그는 덕수궁에 본부를 설치, 분골쇄신 계엄 업무를 완수했다. 그 후 국회의원·건설부장관·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도맡아 박대통령 지근거리에서 오른팔로 활약했다. 그런데 79년 10월26일 저녁 궁정동의 만찬장에서 그는 은인을 시해하고 만 것이다. 육사2기 동기에 고향(경북)이 같다는 이유로 각별한 사랑을 받아 온 김재규 아닌가.
어느 누구보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아 사건 연루자 심판관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해 보였다.
〈정리=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