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194>미국방송에 나오다-89-

화이트보스 2009. 5. 20. 17:07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194>미국방송에 나오다-89-

1953년이 저물어 가는 크리스마스. 전 장교에게 1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 우리들을 받아줄 그 지역 유지들을 연결,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도록 해 주었는데 나는 이중화(중령 예편·작고)대위와 함께 로렌스 목사의 초청을 받았다.

우리를 역으로 마중나온 로렌스 목사가 숙소를 향해 앞서 걷더니 큼큼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코트를 입히라고 호령한다. 우리가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로렌스 목사가 “이게 한국의 풍습이다. 한국 남편들은 마네킹처럼 서 있으면 부인이 옷을 입혀 준다”면서 “한국식이 미국식보다 훨씬 좋다”며 조크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산 미 공군 기지에서 군목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한국의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로렌스 목사의 안내로 달하드의 지방 방송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온 장교의 시간’이라는 내용의 인터뷰가 있었다. 아나운서가 “어떻게 미국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6개월 코스의 미 포병 장교 교육을 받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6·25전쟁과 미국의 인상, 감명 깊은 경험에 대해서도 물었다. 우리의 영어 실력을 아는지라 단답식 질문이어서 우리도 쉽게 대답했다.

이런 내용의 인터뷰가 그날 저녁 TV에 나왔다. 다음 날 아침에는 지역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났다. 나 자신의 표정과 행동을 브라운관을 통해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특히 서투른 영어일망정 당당하게 답변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대견스러웠고, 거리를 걸을 때 우리를 알아보고 주민들이 “하이 코리아!”라며 손을 흔들어 줄 때 애국자인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

다음 날에는 포트실 감리 교회에 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서 깊은 이 교회는 이웃 간의 소통과 우애를 나누는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다. 교회 신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지역민 모두에게 다가가는 우정 교환소 또는 마을 사랑방 같은 분위기를 주었다. 로렌스 목사가 설교에 앞서 “한국군 장교들이 교회에 왔다”고 우리를 앞으로 불러내자 100여 신도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통로를 지나는 우리에게 다가와 일일이 뽀뽀를 해 주었다.

그중 인상적인 모습은 남자 신도들이 예배당 입구 모래가 담긴 드럼통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쑤셔 박고 들어가는데 나오자마자 일제히 또 모래에 박힌 담배를 뽑아 입에 무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모자를 쓰지만 남자들은 반드시 모자를 벗었고 헌금도 모자에 받아 가는데 헌금액은 50센트 이하였다. 우리 한국군 장교들은 1달러를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 미국인 신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로렌스 목사로부터 마카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예수 제자 중 한 사람이 마카스라는데 나는 그 이름을 따 마카스 최로 불렸다. 그 후 나는 일요일만 되면 교회에 나갔다. 무엇보다 돈 쓸 일이 없고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따뜻한 교회 분위기와 미국 소도시 주민들의 소박한 마음씨가 마음을 끌었다.

며칠 후에는 미국의 농가를 찾았다. 농장주 무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사관 출신 재향군인이었다. 당시 미국은 귀환용사들에게 광활한 농토를 대여해 주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개인 소유로 돌려주는 제도를 두고 있었는데 무어는 이 혜택을 받아 농토를 개간하는 중이었다.

정부는 농기구·트랙터·탈곡기까지 빌려 줘 재향군인은 몸만 가지고 가면 된다고 했다. 대개 12∼13년이면 상환을 마쳐 수만 평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 한없이 부러웠다. 제대군인들에게까지 이런 혜택을 주니 누구나 자긍심을 갖고 군대에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