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0월 포병감실에서 갑자기 미국 유학을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전후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군의 전력 증강이라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교들이 직위에 합당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면서 미 국방부에 요청, 한국군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보·포병을 차출해 교육받았는데 포병의 경우 매기 105명씩 차출됐다. 나는 5기로 선발돼 부산에서 미 해군 용선 머린 피닉스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마음이 무거웠지만 당시 미국에 한 번 가는 것이 엄청난 혜택인 데다 누구나 동경하고 선망하는 미국 땅을 밟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시피 한 것이어서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내가 선발된 것은 김계원(군영·육참총장·대통령 비서실장 역임)포병감의 배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김포병감이 대전 2연대 시절 대대장으로 있을 때 나는 경리과 선임하사로 김대대장을 모신 적이 있었다.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김포병감은 사실 내 생에 귀감이 된 분이다.
머린 피닉스호는 보·포병 210명과 고문관·지휘관 등 260명을 태우고 14일 만에 시애틀에 입항했다. 머린 피닉스호가 도착하자 분수선이 마중 나와 포물선을 그리는 물포를 쏘아 주고 치어리더들이 부둣가에서 춤추며 환영했다. 마치 우리를 세상의 주인공처럼 맞아주자 우리 가슴은 한없이 부풀었다.
미국 땅에 내리자마자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촌놈 같은 생각이지만) 판잣집이나 초가집이 한 채도 없다는 것, 집집마다 TV 안테나가 달려 하늘을 뒤덮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동차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 44사단 130연대 포트루이스 캠프에 수용됐다. 시애틀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면 포트루이스가 나오는데 길을 가면서 우리는 미국의 국부(國富)를 보며 한없는 부러움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태평양의 큰 파도에 배가 가라앉지 않을까 겁먹었던 6·25 전쟁 영웅인 우리는 미국의 부 앞에서 다시금 오금이 저려 오고 왜소해지는 것을 느꼈다.
44사단에서 며칠을 보낸 우리는 남행 열차 폴맨(1등 기차)을 타고 2박 3일 동안 포틀랜드∼ 팬더래튼 ∼ 맨파 ∼ 포카테로∼ 덴버 ∼ 캔자스시티 ∼ 털사∼ 오클라호마를 거쳐 포트실에 도착했다. 이곳이 포병학교가 있는 곳이었다(인디언과 최후 공방의 포사격을 한 연고가 있는 지역이다).
학교에서의 학습 과목은 포술학, 축지와 기상학, 자동차학, 관측과 연락 요령, 연락 장교 업무 요령, 정비학, 기계학, 탄약관리학, 화력 지원 계획, 지휘통솔 기법, 지휘소 운영 요령 등 광범위한 신군사 지식을 배우고 실습하는 것이었다.
미군이 영어로 강의하면 한국군 출신의 전문 통역관이 통역했다. 통역 장교 중에는 후일 KAL 사장이 된 조중건 중위도 포함돼 있었다.
미 포병학교의 학습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군의 홈식(homesick) 등을 배려한 민가 방문과 교회 인도 등 빈틈없는 과외 활동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나는 춘천 처가에 두고 온 신혼의 아내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내 역시 일기를 써서 거의 매일 보내오다시피 했지만 그리움의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이런 때 미 포병학교에서 민가와 연결해 한국군 장교들을 보내주곤 했는데 나는 마침 포드실 감리교회 목사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매기 한국군이 가면 몇 명씩 받아 먹여 주고 입혀 주곤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주한 미 공군 오산 기지 군목(소령 예편)으로 활약한 윌리엄 로렌스 목사였다. 나는 로렌스 목사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목회자의 덕목인 사랑·봉사·헌신·배려·평화를 배웠다.
〈정리=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