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부대이기는 했지만 첫 파월 비둘기부대장으로 가는 조문환 장군으로서는 대답을 한 이상 본인이 죽지 않고는 현지로 떠나야 할 운명이다. 더군다나 그는 용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자기 이름에 걸맞은 자존심 때문에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나약한 인간이며 병든 아내와 나이 어린 외아들을 거느린 외로운 가장이다.
“그런데 최중령, 총장 각하께서 내 대답을 듣고는 ‘과연 듣던 대로구나’ 하셨는데, 듣던 대로가 뭐요?”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장님께서 기합을 잘 넣잖습니까. 지휘봉으로 영관급의 배도 찌르고, 이 새끼 저 자식 한다고 해서 악평이 좀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야지. 그렇잖아도 (꾀병으로 파월을 기피한) 김○○ 장군도 욕을 먹고 있는데 나까지 욕먹는다면 안 되지. 최중령, 나랑 함께 가지.” 조장군은 불쑥 이렇게 제의했다. 나는 흠칫 놀랐다. 나를 인정해 준 것은 좋지만 생전 처음 가진 단란한 가족들과의 생활에 또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낙심천만이 되고 말았다.
열여덟에 군에 입대해 어렵게 가정을 꾸미고 군인 생활 17년 동안 풍찬노숙하듯 이리저리 이사 다닌 횟수만도 18군데나 된다. 그리고 간신히 서울 금호동에 단칸집을 하나 마련해 모처럼 안정된 생활과 가장으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데 베트남에 가자고 하다니. 조장군이 나에게 여러 모로 배려해 준 것은 좋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나는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저는 노모님이 계시고 지금 위중하십니다. 그리고 조장군님이 파월 선봉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시려면 완벽한 후방 지원이 절실합니다. 저는 후방에서 파월 통합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 후방 수습이 되는대로 처장님을 곧 뒤따르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조장군은 언제나 단순했다. 옳다고 믿으면 곧바로 수긍하고 수용하는 시원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기합 대장’만이 아니라 부하의 합리적 안이라면 자신의 무지를 쉽게 인정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이는 도량 큰 군인인 것이다. 부하가 아는 체하며 안을 내면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고 엿 먹이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조장군은 1965년 2월5일 비둘기부대 결단식을 갖고 3월10일 역사적인 파월 선봉장이 돼 베트남으로 떠났다. 나는 꾀를 부려 동행하지 않았으나 약속대로 뒤이어 베트남에 갔다(이 부분은 ‘나의 파월 시절’때 기술).
사실 조장군이 파월 선봉장으로 임무를 완벽히 완수함으로써 맹호·백마·청룡부대 등 전투부대의 후속 파월에 단단히 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됐다. “최중령은 내가 파견한 본부 지휘관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이렇게 말하고 그는 떠났지만 일단 유사시에 그는 언제나 맨몸으로 진가를 발휘하는 장군이었다. 그가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조장군을 깊이 신뢰, 자신이 지휘했던 5사단장으로 영전시키고(5사단장은 김재규 등 박대통령의 오른팔이 거쳐 가던 곳이다) 수도군단장, 국군의 날 제병 지휘관, 국방부차관, 국가비상기획위원장(장관급)으로 중용했다.
용감한 군인상과 청렴결백한 군인상을 남긴 조문환 장군. 나는 고인이 된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은 헌시를 썼다(나는 그가 5사단장 시절 포병사령관으로 그와 다시 만났다. 이 부분도 후일 기술).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