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 <212>참모총장의 긴급 호출-107-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4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 <212>참모총장의 긴급 호출-107-

조문환 장군이 조니 워커를 잔에 가득 따라 나에게 권했다. 나는 그대로 받아 마시고 조장군에게 반배를 쳐서 올렸다. 주위에 있던 장군들도 나에게 위로주를 따르고 나는 대신 반배로 답례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다섯 잔을 마시니 머리가 알딸딸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브리핑은 최갑석 중령 차례지만 진급한 최창주 중령에게 시킬 테니 천막에서 푹 주무시오.”이 말을 들었 때 설움 같은 것이 복받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참았다. 나는 조금은 인사 제도를 원망하며 안주도 없는 ‘깡술’에 취해 침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최창주 중령이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최중령. 나만 진급해 미안해서 어떡하지?”미안해하는 그도 어디서 구했는지 조니 워커 병을 들고 있었다. 비록 라이벌 관계였지만 그는 자기 때문에 나의 진급이 누락됐다며 몹시 가슴 아파했다.“아닙니다. 최중령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로 보아선 최갑석 중령이 되는 건데 내가 선임이라는 이유로 먼저 된 것 같소. 그러니 다음에는 꼭 최중령 차례가 올거요. 자, 우리 실망하지 말고 건배합시다.”

마른오징어 안주가 있었지만 연거푸 마시니 나는 대취하고 말았다. 다음 날 브리핑 시간이 되자 나는 의연히 상황실로 갔다. 내 시간은 내가 써야 하고 그것이 군인의 기본 복무 자세다. 조장군의 권유도 있었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유창하게 브리핑하자 어느 처장이 말했다.

“진급에 빠지고도 여전히 명랑하게 근무하는 최중령의 태도가 좋아. 우리 모두 최중령을 위해 박수를 칩시다.”

상황실 회의에는 장군에서 중령급 이상 9처감실 60여 명이 참석했다. 지휘소 연습(CPX)에 참가한 인사참모부의 9처 참모부는 부관감·헌병감·법무감·의무감·군종감·민사감·본부사령·원호관리단 등이었다. 그리고 인사참모부의 경우 기획처·인력처·인사관리처·장교관리처·제도연구실로 구성돼 있었다.

말하자면 육본의 두뇌가 다 모이는 회의인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내색 없이 어제와 똑같이 정례 브리핑을 하자 모두 놀란 것이다. 사소한 이런 태도가 그 사람의 덕성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여의도 지휘소 연습을 마치고 육본으로 귀대한 어느 날 조문환 기획처장이 급히 나를 불렀다. 그의 방으로 가자 조장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최중령, 지금 민기식(군영·대장 예편) 참모총장 각하께서 속히 올라오라고 하시는데 무슨 일이지?”

조장군은 얼마 전 여의도 훈련이나 부대 계획 개혁안이 혹시 잘못된 것이 없나 검토해 보라며 불안해했다. 나 역시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아 여러 가지로 머리를 짜냈다. 마침 부대 계획 개혁안을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는 것을 기다리던 시기라는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부대 계획을 설명하라는 지시 말씀이 아닐까요?”사실 나는 부대 계획 차트를 만드느라 열흘 가까이 밤을 새운 처지였다.“그래, 그걸 거야. 그럼 차트를 가지고 총장실로 올라가자고.”

말이 부대 계획 차트지 전지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둘러메고 가기에도 힘든 분량이었다. 조장군이 질린 얼굴로 앞장서고 나는 차트를 어깨에 메고 조장군을 따라 참모총장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총장실의 수석 부관(중령)이 무겁게 메고 올라간 차트 덩어리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조장군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지요?”“부대 계획 차트요. 그동안 대기 중이었는데 각하께서 부르셔서 보고차 가지고 온 거요.”“그것이 아닐 텐데요. 각하께서 조장군님만 부르셨으니 장군님만 들어가시죠.”나는 기다리던 막차를 놓친 사람처럼 멍해져 버렸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