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군대학 시절 육본 기획통제실장이던 손희선 장군이 강의한 부대 운영 계획의 개요와 작성 기법 등에 힘입어 개선안을 획기적으로 마련했다. 서울 문리실과대에서 밤공부하며 터득한 현대 경영학을 활용해 인사 관리와 조직 관리에 이론적 근거를 적용하고 기획안을 창안·제안함으로써 인사참모부의 직능과 기능, 기구의 보강을 위한 연구 제안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육본 인사참모부의 대폭적인 임무·기능 조정과 각 기구들의 증·감편, 창설·해체가 단행됐다. 대표적인 개편안은 육군전투발전사령부 창설, 인사운영감실 창설, 기획·계획 업무의 분리, 연구 기능 강화를 위한 연구 분야의 과 승격, 인력활용과 신설, 장교 보직처와 부관감실 사병 인사권을 OPO(인사운영)로의 이관 등이었다.
부대 계획 수립시 손장군이 교육한 부대 운영 계획의 서식과 양식을 새롭게 정비해 사업별로 목적 기간, 목표량, 인력·물자·예산의 소요, 주·부 협조 체계 등을 명시했는데 이는 육군이 선도하고 국방부의 권장으로 국군 전체에 적용됐다. 그리고 이는 정부 각 부처 국영기업체까지 파급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기획·계획의 통제, 심사분석, 감사·평가를 하고 능률 증대를 위한 시정 보완책을 마련한 것이다.
이 중 획기적인 것은 인사직능화 관리를 전담하는 부서로 미국이 시험 시작한 OPO 부서를 신설한 점이다. 병사 인사 관리를 부관감실(AG)에서 하던 것을 인사운영감실로 통합, 교육 직능 중 부대 교육과 훈련을 작전참모부 기능으로 남겨 두고 개인 교육 기능은 인사참모부로 이관했다.
이 같은 혁신안은 그동안 명령·지시조의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행정 관리 체계를 새로운 미국식 현대 경영 관리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해서 육본의 정책 부서가 크게 격상되고 군사혁명 과업에도 기여하는 계기가 됐다.
그해 11월 육본 CPX(지휘소 연습)가 여의도 비행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에서 열렸다. 육본은 매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지휘소 연습을 했는데 모래 벌판에 천막을 치고 각 참모부가 상황실을 운영하며 전술·전략을 실제로 운용하는 훈련을 폈다. 그해 ‘양최’(兩崔) 중령의 대결이 볼만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사상황실에서는 최창주(호국사관학교 1기)중령과 나를 A·B조로 나누어 운영했다. 하루 두 차례씩 있은 브리핑에서 그와 나는 브리핑 각축전을 벌인 것이다. 5·16 직후 차트와 브리핑 문화가 일대 유행이었는데 최중령과 나는 서로 논리적 설득력과 호소력 있는 설명으로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
훈련 도중 대령 진급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진급은 1개 참모부에서 한 사람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두 중령 중 한 사람이 탈락하게 돼 있었다. 그런 며칠 후 최중령이 진급되고 나는 떨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기획처장인 조문환(육사7기·군단장·국방부차관·비상기획위원장) 준장으로부터 밤이 깊었는데 CP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천막에 들어가자 인사참모부 주요 장군들이 조장군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조장군이 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갑석 중령, 안됐소.”
나는 이미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각오는 돼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듣자 가슴으로 무엇인가 쓰라린 것이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어쩌면 계급정년을 하고 정든 군문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가 먼저 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됐으나 내 앞길이 막막해서 가슴으로 철렁 무엇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말했다.
“최창주 중령이 선임이니까 먼저 진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자 조장군이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리에 앉자 조장군이 조니 워커 한 병을 가져오더니 잔도 하나 내놓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