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 육사 입교 후의 생활은 언제나 표면성과 내심의 이중성으로 갈등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조선인 육사생은 대체로 그러했으리라. 겉으로는 일본을 위해 입교한 것이지만 내심은 잃어버린 조국을 생각하게 되고, 특히 배일(排日)사상이 강한 가대(家代)의 영향을 받은 나로서는 더 많은 갈등을 느꼈다.
나는 입교하자 경기중 4학년 출신인 이재일군과 가까이 지냈다. 같은 4학년 출신이었기에 자연히 가까워졌다. 저녁 식사 전 1시간여의 휴식 시간에 그와 나는 연병장 옆 소나무 숲을 거닐며 비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김영수·김호량 선배가 남기고 간 말을 되새기며 일본 패망 이후 우리 조국의 미래를 점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나는 중학교 때 세 친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 오혁종군은 민족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니 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고(실제로 그는 서울농대에 입학해 농학 박사가 됐다) 유광호군은 상공업을 잘해야 나라가 부흥한다며 기업인이 되겠다고 했다(그는 후에 서울상대에 진학, 은행장이 됐다). 그러나 나는 강한 군대라야 나라를 세울 수 있다며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조부의 무과 급제와 아버지로부터 왕실의 무능과 군에 대한 푸대접 이야기를 늘 들으며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군량미를 모래와 섞어 주고 나머지는 착복하는 등(임오군란) 군을 업신여기고 국제 정보에는 백치나 다름없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로 당쟁만 일삼으니 망국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탄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나는 이 점을 이재일군에게 강조했다.
“그래, 군인의 길을 택한 것은 잘한 거야. 하지만 일본 패망 이후 우리 조국이 무엇을 할 것이냐가 문제야. 지도자는 누구고, 국가 정체는 무엇이며, 나라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를 생각해 봐야 해.”
“그렇군. 지도자는 미국에 계시는 이승만 박사로 하느냐, 상하이(上海) 임정의 김구 선생으로 하느냐, 아니면 영친왕이냐 또는 만주의 김일성 장군으로 하느냐….”
그중 나는 김일성 장군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소년 시절 나의 신화이자 전설적 영웅인 김일성 장군이 조국을 건설하는 데 이상적일 것 같았다. 그는 일본 육사 23기 기병 출신으로 중위 때 서울로 휴가 나와 1919년 3·1운동을 만났는데 이때 뜻을 세우고 동료와 함께 만주로 탈출해 유격대를 창설,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국가 체제는 제국이냐 왕국이냐 공화정이냐가 문제인데….”
이재일이 이런 고민을 하자 나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
“지도자의 명칭을 총통으로 해야 하나, 미국처럼 대통령으로 해야 하나, 아니면 황제로 해야 하나, 왕으로 해야 하나.”
설익기는 했지만 우리는 나라를 찾았을 때의 청사진을 한없이 그렸다.
“동맹 관계는 반드시 전승국과 맺어야 돼. 그래야 우리 길이 크게 열려.”
그러나 일제가 보통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김일성 장군처럼 망명할 것도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망명지는 만주나 몽골·소련을 상상했으며 망명시 이름은 나의 본명이 장동채였으므로 張東日로 하고 이재일은 李東日로 고치고, 나는 중국어·몽골어, 이재일은 러시아어를 하기로 했다. 군대는 항공을 지망하기로 했는데 이유는 제트기 획득과 원자폭탄 투하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선배 강제원이 “김일성 장군은 성냥갑만한 원자탄을 구하고 있는데 그것을 일본 본토에 터뜨리면 섬 전체가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서져 버린다”는 어마어마한 말을 들었다. 그것을 비행기로 떨어뜨려야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비행사가 될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육사 1학년 하기 방학 때다. 귀국해서 광주서중 모교를 방문했는데 마침 교장선생님(일본인)이 전교생 앞에서 육사 생활을 소개하도록 했다.
일왕의 생도들에 대한 관심도(총기·피복·특별 부식이 모두 일왕의 이름으로 지급된다)를 설명하던 중 구한말 우리 왕실의 군에 대한 홀대로 군 기강이 제대로 서지 못했으며, 결국 일본군 2개 중대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됐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