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치르고 고향에 돌아오자 병중인 숙부가 돌아가셨다. 장례 절차에 따라 상복을 입고 상여를 뒤따라가는데 광주서중 2년 후배인 조카가 금방 광주에서 내려왔다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삼촌, 어제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 조회가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이 삼촌 이름을 대면서 5학년도 아닌 4학년 생도가 (일본) 육사에 합격했다고 자랑했어요.”
시일이 지체돼 불합격인 줄 알고 상심해 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광주로 올라갔다. 사택으로 교장선생을 찾으니 과연 6명의 서중 응시생 중 나만 합격한 것이다.
조선인 합격자는 총 4723명 중 나를 포함해 6명이었다. 이 가운데 4학년 재학 중 합격자는 경기중 출신의 이재일과 나 단둘이었다. 나머지 4명은 경복중·동래중·청주중·성남중 출신이었다. 타 민족 출신 중에는 대만인·만주족 등이 있었으나 99%가 일본 본토 출신이었다.
1944년 1월 나는 도쿄 교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예과) 60기로 입교했다.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57기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조선인 출신 선배 3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조선인 졸업자는 본교 출신과 만주 군관학교 출신까지 포함해 모두 6명이었는데 이 중 박정희(전 대통령) 선배는 군적이 만주 군관학교여서 곧바로 만주로 떠났고, 김영수(김석원 장군 차남) 선배와 경기중 출신의 김호량 선배가 찾아와 기숙사 밖 소나무 숲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나는 두 선배로부터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우리 말을 잘 들어라. 일본은 이번에 진다. 반드시 지게 돼 있다. 우리나라를 찾을 때를 대비하라. 그러니 절대로 살아남아야 한다. 일왕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다. 살아남는 자만이 큰일을 하고 조국에 충성하는 길이다.”
아니, 이기는 전쟁을 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 입학하자마자 패배하게 돼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을 뿐더러 너무나 충격적인 발언이어서 이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두 선배는 당당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영원한 동지다. 학과와 실기에 충실해 절대 일본인에게 지지 마라. 앞으로 전쟁은 항공전이다. 너희는 항공과를 지원해 조종사가 돼라. 나라를 찾아 건국하면 우리 군대를 만들 것이다. 두 번 다시 부패·무능한 조정, 군대 양성도 외면한 구한말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런 말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발언이나 진배없었다. 피로 맺은 동지적 결속력과 신뢰감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절대로 죽지 말자던 김영수 선배는 그해 필리핀 레이테 섬 전투에서, 김호량 선배는 6·25전쟁 때 전사하고 말았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인재를 너무나 일찍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크다).
이들 선배를 만난 한 달 후 영친왕이 조선인 입학생을 왕궁으로 초대했다. 왕궁에서 만난 영친왕은 일본 육군중장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방자 여사는 곱게 기모노를 차려입고 있었다. 이방자 여사가 우리에게 센베이 과자와 차 한 잔씩 따라 주는데 양이 적어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영친왕은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으며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적으로 매우 불편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4월29일은 일왕의 생일이라는 천장절이다.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일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일 축하 관병식이 있었다. 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행사였다. 그 위세를 보면 일본군이 패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사열대 앞에 정렬하고 있는 중대 선두에 서 있었는데 바로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영친왕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裕仁)는 사열대 위에 히로유키(백설)라는 매끈하고 품위 있는 백마를 타고 있고 단하에 영친왕이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박힌 말을 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초라하고 표정도 침울해 보여 왠지 가슴이 멍멍해졌다. 우리 왕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 보여 눈물이 났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