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54>제3話 빨간 마후라 -4-집단 구타를 당하고

화이트보스 2009. 5. 23. 15:17
<254>제3話 빨간 마후라 -4-집단 구타를 당하고

전쟁 말기라 젊은 교사들은 모두 전선에 투입돼 학교에는 교사 수가 절대 부족했다. 이로 인해 역사와 한문·음악 등 많은 과목에서 4, 5학년이 합반 수업을 받았다. 어느 날 한문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5학년보다 4학년 평균 점수가 더 높게 나왔다. 한문 시간에 일본인 교사가 5학년을 닦달했다.

“이놈들, 동생들보다 공부를 못해가지고 어디에 써먹겠나.”

물론 공부를 잘하라는 자극적인 훈계였지만 5학년생들은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문만이 아니라 다른 과목, 심지어 유도나 검도에서도 4학년 후배들에게 깨지는 경우가 있었으니 화가 났을 법도 했다.

그 무렵 교내에서 이러저러한 사보타주가 있었다.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는 일,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 이름이 ‘마무시’라는 괴이한 동물 이름과 같아서 뿔 달리고 혓바닥 길게 늘어뜨린 하등 동물 만화로 그려 화장실에 붙여 놓은 일 등. 얼마 후에는 일왕 사진에 오줌을 싸서 벽에 걸어 둔 사건도 일어났다. 나주군수 아들이자 5학년 1반 반장인 박화진과 동급생 심균우가 주동 인물이었다.

이것이 누군가의 밀고로 덜미가 잡혔다. 학교에서는 퇴학 처분을 내리려 했으나 학생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없던 일로 하고 대신 광주경찰서 사찰계가 주동자를 미행·감시토록 했다. 이에 화가 난 박화진·심균우 등 20여 명의 상급생이 밀고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본 육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4학년 1학기만 마치면 응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전 교과에 전심전력을 쏟았다. 반장도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1943년 5월10일 오후(이날을 잊지도 않는다). 청소 당번인 나는 구마키 담임교사에게 청소가 끝났음을 보고하고 교실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4학년 동급생이 달려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지금 5학년생들이 4학년 애들을 때리고 있어. 오준석이가 뻗어 버렸어.”

“뭐?”

“밀고자를 잡았다고 패고 있당개!”

“준석이는 그럴 애가 아닌디?”

나는 순간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운동장 건너편 으슥한 탱자 울타리 쪽에서 5학년 상급생들이 4학년 아이들을 세워 놓고 주먹과 몽둥이로 때리고 있었다.

오준석은 벌써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뻗어 있고 늑막염 때문에 휴학해 우리와 동급생이 된 주진석(정래혁 전 상공부장관의 처남)도 얻어터지고 있었다.

나는 아차 했다. 한문 성적 때문에도 4학년생들이 걸리기만을 벼르고 있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다른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치사한 밀고자 놈들! 너희들은 간나구 놈들이여!”

조선말을 쓰자고 했던 점, 일왕 사진에 오줌을 싸서 벽에 걸어 놓은 사보타주를 4학년생이 밀고했다는 것이고, 그중 혐의가 가는 아이 10여 명을 세워 놓고 혼내고 있는 것이다. 한문 성적이 떨어진 망신까지 더해 보복을 가하니 그것은 선배로서의 체벌이라기보다 집단 린치였다.

사실 성적에 관한 한 학교 잘못도 있었다. 교사가 부족하다고 윗학년과 합반하고 시험을 보면 결과를 알려 주니 그들의 자존심이 상할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항일정신의 전통을 이어 가는 사보타주 행위를 밀고했으니 더 분개하고 있었다.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나는 반장으로서 정중히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자식, 너도 한통속이여!”

내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외치며 나를 발길로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몽둥이와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곧 쓰러졌고 머리·허리·다리·팔에 무수히 발길질과 몽둥이질이 쏟아졌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