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53>제3話 빨간 마후라 -3- 수석 합격과 소년 비행사

화이트보스 2009. 5. 23. 15:16
<253>제3話 빨간 마후라 -3- 수석 합격과 소년 비행사

1940년 광주 서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수석 합격자는 1반 반장, 2등은 2반 반장을 했는데 많은 합격자를 낸 광주 시내 서석학교 출신들의 텃세가 심했다. 촌놈 취급을 할 뿐 도무지 반장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었다.

5월1일은 개교 기념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전교생을 대상으로 1만m 단축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광주~송정리 중간 지점을 왕복하는 코스인데 반환 지점에 가자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평초등학교 통학 거리 6km를 내내 뛰어다녔으니 광주 시내 출신이 대부분인 그들이 나를 앞설 수는 없었다.

한참 달리다 뒤를 돌아보는데 졸업반인 육상부장이 헐레벌떡 나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속도를 줄였다. 육상부장의 체면을 세워 주고 싶었다. 굴다리를 지나오는데 굴다리 위에서 일본인 교장 에도모토(木夏)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왜 달리다 마냐. 빨리 달려라!”

나는 도리 없이 다시 속도를 냈다. 그러나 교장이 보이지 않자 또 천천히 달리면서 육상부장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이 소문이 전교에 퍼졌다.

-의리의 1학년 마라토너가 있다.

이 소문에 따라 육상부장이 나를 육상부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농구부·수영부에서도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하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덩치가 크니 운동부에서 욕심낼 만도 했다. 이를 계기로 반장으로 인정하지 않던 서석 출신 아이들도 나를 새롭게 보았다.

소년 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던 나는 글라이더반에 들어갔다. 운동부 참여는 선배들의 강제적 권유 때문이었지만 글라이더반은 순수한 자발적 참여였다.

여름 방학이 되자 송정리 비행장에서 글라이더 비행 훈련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중이라 학교는 전시에 대비하느라 글라이더반의 비행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나는 평소 소망했던 비행사의 꿈이 현실로 다가와 누구보다 훈련에 열심히 매달렸다.

글라이더반은 초·중·고급반이 있었는데 나는 1학년이었으므로 초급반이었다. 초급반이라도 글라이더를 띄우는 데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1, 2조로 편성된 조원(각 6명)들이 땅바닥에 말뚝을 박아 글라이더를 고정시켜 놓고 이를 굵은 고무줄로 연결해 잡아당기는데 조원들이 “이치 니”(하낫 둘), “산 지”(셋 넷)하며 고무줄이 팽팽할 정도로 끌고 간다.

더 이상 고무줄이 나가지 않는다 싶을 때 교관이 호루라기를 불어 말뚝에 묶인 글라이더를 풀어 놓도록 지시하면 글라이더는 팽팽한 고무줄의 탄력으로 붕 떠서 날게 된다. 15~20m 높이로 떠서 약 60~70m 나는데 글라이더에는 글라이더반원 중 한 명이 타고 실제 비행 연습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훈련을 잘 받지만 조작 미숙이나 운전 미숙, 나아가 돌풍을 만났을 때 동체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쳐 머리를 다치거나 목뼈·다리·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사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지 않은 글라이더반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부상을 당하지 않고, 그것도 가장 많이 글라이더를 탔다. 아마 30회 정도는 탔을 것이다. 이를 지켜본 교관도 별 신통한 놈 다 보았다는 듯이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럴수록 나는 소년 비행사가 된 것 같이 기분이 붕 떴다.

글라이더를 잘 타는 것도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적극적이고 용기 있고 담대하냐, 기초 체력이 얼마만큼 다져졌느냐와 직결됐다. 나는 다행히 시골 초등학교 6년간 매일 왕복 12km를 달린 기초 체력이 있었던 것이다.

유도부에서도 나를 스카우트했다. 기초만 배웠는데 두 달 후 도내 중학교 유도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유도 대회에서는 이상하게 일본인 학교인 동중학교와는 붙이지 않았다.

도교육위원회는 광주 학생 사건 이후 일본인 학생과 신체적으로 부딪치는 일을 각별히 유의하는 것 같았다. 나와 맞닥뜨린 상대는 순천중 학생이었는데 마침 일본인이었다. 나는 그를 반 죽여 놓다시피 목을 조르고 팔을 꺾었다.

심판이 나에게 한판승을 주면서도 호되게 꾸짖었다.

“유도는 싸움이 아니다!”

이것이 문제가 돼 그후 각종 대회에서 일본인 학생과 부딪치는 일을 주최 측은 없애 버렸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