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52>제3話 빨간 마후라 -2-“나도 장군처럼 큰 인물 될거다”

화이트보스 2009. 5. 23. 15:14
<252>제3話 빨간 마후라 -2-“나도 장군처럼 큰 인물 될거다”

1929년 11월3일. 광주~나주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광주 동중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전남욱· 전남여고)을 희롱한 것이 도화선이 돼 일어난 광주 학생 사건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1919년 3·1운동 후 10년 만에 다시 조선 독립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제압하느라 일제는 나주 지역의 많은 학생과 유지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 나주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공포심보다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보수적이기는 하나 기품 있는 양반의 고을이자 자부심의 고을로 통하는 나주 사람들은 볼품없는 일본 사람들에게 조선 민족이 당한다는 것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저항의식은 타 지역 주민보다 훨씬 강했다.

우리 어린이들도 그 영향을 받아 등·하교길에는 늘 이런 이야기들이 주요 화제가 됐으며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김좌진·김일성 장군 이야기만 나오면 어린 소년의 가슴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우리 집안의 내력으로 보아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의 조부 형제는 구한말(1888년) 똑같이 무과에 급제했고 그중 둘째 조부는 수군만호(水軍萬戶)로 복무하다 동학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장군이었다.

고종 사촌 형(고모의 아들) 나재기(羅在基)는 나주 궁삼면의 왕실 토지를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강압적으로 매수해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물리는 등 수탈이 극심해지자 면 대표로 나서 싸우다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과 가혹한 고문을 당해 끝내 불구가 됐다(나주 궁삼면 항일운동 사건).

언론인이자 청년 운동가인 외삼촌 최종섭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요인(이시영·김창숙)에게 독립 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비밀 결사 지도자였다.

나라를 잃은 뒤 탄식처럼 읊조리던 아버지의 넋두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왕실 조정이 무능하니 나라를 빼앗기고, 또 허약한 문(文)에만 기대니 쓸모없는 형식 논리에만 빠지고, 무인을 등한시하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힘조차 없구나.”

말하자면 실질과 군대 양성이 나라를 세우는 기초인데 이것 모두를 잃거나 방치하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탄식이었다.

나주 지역은 양반의식이 강해 우리 집 가풍도 그런 일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두 분 조부 형제의 경력에서 보듯 다분히 현실 중심의 무과(武科)적 기질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란 나는 윗학년 강제원의 이야기를 듣고 일본 육사를 꿈꾸게 됐다. 무엇보다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강제원에게 물었다.

“성, 김일성 장군 이야기 더 해 줘.”

“김일성 장군은 독립군 대장이랑개. 축지법을 쓰는 사람이여. 백두산·금강산·지리산을 폴짝폴짝 뛰어 댕기면서 일본 놈들을 조자부러.”

자꾸 듣지만 언제 들어도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존재가 현실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영웅담은 과장됐는지 모르지만 말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이 부푼 꿈과 기개를 안겨 주기에 족했다. 우리의 기대치가 컸던 만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당장의 현실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제원도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식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렀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될 뿐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일성 장군은 본명이 김광서로 일본 육사23기 출신이며 나이는 50대였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본명 김성주)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나의 중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큰형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나에게 일반 중학교보다 한 달 먼저 시험을 치르는 광주사범학교에 테스트 삼아 응시토록 했는데 나는 거뜬히 합격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왕 합격했으니 관비 혜택과 직업 보장을 들어 사범학교에 입학하기를 주장했고 큰형은 나의 장래성을 기대하고 광주서중을 권했다. 공업학교를 나와 군청 직원으로 나가고 있는 열 살 터울의 큰형은 이상주의자였으며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아버지, 동채(나의 아명)는 학교에서 언제나 수석입니다. 저렇게 머리 좋은 아이를 농촌에서 교사로 썩히기에는 재능이 아깝습니다. 크게 써먹어야지요.”

결국 큰형의 이상론이 아버지의 현실론을 이겼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