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을 때 주진석·지정무 등 두 상급생이 뒤늦게 나타나 나를 보더니 “급장이 무슨 죄냐”며 상급생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주진석 선배의 등장으로 동급생들이 구타당하는 일은 중단되고 나는 깨어나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말리러 간 나를 뻔히 아는 상급생들이 집단 폭행하고, 특히 박화진과는 동향인 데다 아버지들끼리도 내왕이 잦은 사이다. 그래서 환멸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사태는 며칠간 학교 측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얻어맞은 동급생들 중에 순천·광산군수, 도청·경찰 간부의 아들도 끼여 있어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자연히 부모들이 알게 됐고 그래서 학교 측에 항의하다 보니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말았다.
광주경찰서는 대상 학생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나도 경찰서에 불려 가 불고지와 무단 결석을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담임교사 구마키 선생이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나를 퇴교시키겠다고 나섰다.
나는 몸이 만신창이가 된 고통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학교를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급장으로서 만류하러 간 나를 선배들이 한통속으로 보고 때리고, 거기에 경찰서나 담임교사는 나를 불고지에 무단 결석을 이유로 퇴교 운운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억울하게 얻어맞고 벌을 받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교련교사 미야케 중위가 사람을 시켜 급히 학교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미야케 중위는 내가 2학년 때 소년비행학교에 가려고 하자 “6개월 코스의 하사관학교에 뭐 하러 가느냐. 육사에 가서 정식 비행 장교가 돼라. 너는 할 수 있다”며 격려해 준 분이다. 학과 성적과 교련 성적이 좋으니 육사를 지망해야 한다며 여러 가지 지침을 주기까지 했다. 큰형도 같은 의견이어서 나는 거기에 목표를 두고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 소설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미야케 중위가 부른다고 해서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다. 등굣길에 친구들로부터 미야케 중위가 구마키 교사를 단단히 혼내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구마키 선생이 너를 퇴학시키겠다고 공공연히 발언했는데 말이다. 미야케 중위가 교육자로서 취할 일인가 하며 담임선생을 혼내 줬대.”
당시는 전시 체제라 교련교사의 힘이 막강했다. 교장선생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설 자리는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구마키 선생 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상황으로만 치닫고 있는 것이다. 교관실에 갔더니 미야케 중위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다 알고 있다. 너는 결백하고 남아답다. 학교 다니는 일이 힘들면 집에서 자습하라. 대신 육사는 꼭 응시하겠다고 약속해라.”
사실 나는 퇴학 처분 운운한 담임교사와 맞닥뜨리며 학교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미야케 중위에게 육사 응시를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미야케 중위는 학교 측에 “육사 시험을 앞둔 이 학생을 퇴교 운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상관인 시즈카와 중좌를 통해 광주경찰서장에게 이 학생을 오라 가라 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한 것은 경찰이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항일 투쟁을 해 온 우리 가대(家代)의 내력이 노출될까 하는 점이었다. 다행히 미야케 중위가 보호하면서 나의 걱정스러운 가족사는 묻혀 가게 됐다.
4개월 동안 집에서 자습하던 나는 1943년 10월 일본 육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시험 장소는 용산중학교였다. 시험장에 도착하자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