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사 예과를 마치고 본과(항공사관학교)로 진학한 1945년 3월 어느 날, 학교에 늙은 병사 한 명이 들어왔다.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인 농부 출신의 40대였다. 태평양 전쟁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던 일제는 젊은이는 모조리 최전선으로 내보내고 후방은 이런 노병을 재소집해 군을 지원토록 하고 있었다.
늙은 병사는 동해 쪽의 어촌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유독 친근감을 보였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일본 육사 시절 당번병을 했으며 그래서 장총통과 같은 발음의 성씨인 나를 중국인으로 이해하며 친근감을 보였다. 그는 노역을 하다 말고 내 곁으로 다가와 곧잘 고향 얘기를 했다.
“장생도, 우리 선조는 어부였다네. 고기를 많이 잡는 비법을 알고 계셨지.”
“어떻게 알고 있나요.”
“그거야 간단하지.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가면 ‘도쿠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그 섬 주변이 황금 어장이야. 거기만 가면 만선을 이룬다네.”
그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하곤 했는데 늘 황금 어장인 ‘도쿠도’를 자랑했다.
‘도쿠도’란 두말할 것 없이 우리의 독도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는 당시에는 없었다. 우리의 독도를 일본 발음으로 ‘도쿠도’라고 했고 섬 도(島)를 일본 발음 ‘시마’라고 부르다 보니 ‘도쿠시마’가 됐고, 그것이 또 일본 발음상 부르기가 불편해 ‘다케시마’로 전화시켜 부른 것이 오늘날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竹島)가 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 즉 독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위섬일 뿐 대나무가 자라지도 않았고 자랄 수도 없다. 지역 특성과 연관시켜 지명을 붙인 근거도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당시 ‘도쿠도’가 우리의 독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다케시마가 아닌 ‘도쿠도’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일본은 ‘다케시마’라고 임의로 명명해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모습을 보고 본질적으로 섬사람의 속 좁은 면을 보게 된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병탄한 뒤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지명이 붙여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패망과 함께 1946년 1월 미국 점령군사령관의 명령을 통해 독도는 일본의 주권 범위에서 벗어났다. 조선은 독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갖고 독립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도라는 돌섬은 한반도와 함께 일제 식민 지배 하에 있었지만 해방되면서 한국 땅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내가 일본 육사 시절 늙은 병사가 선조들로부터 들었다는 ‘도쿠도’(독도)는 적어도 1800년대 초부터 명명됐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말해 주고 있다.
최근 국내 우파 학자들이 일제 식민 지배가 한반도의 철도 연결, 항만 구축, 신교육 실시 등으로 발전에 기여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철도 건설은 그들의 대륙 침략을 위한 방편으로 만든 길이었고 농산물·광물을 비롯해 집 안의 놋그릇·숟가락·젓가락까지 수탈해 간 것을 두고 은총 운운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조상들의 묘를 쇠꼬챙이로 찔러 광물질과 도자기를 훔쳐 간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집단이다.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조상의 묘까지 샅샅이 파헤쳐 쇠붙이는 폭탄을 제조하는 데 쓰고 보물은 교토(京都) 등 그들의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것부터 되돌려 줘야 할 것이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이분법적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데 나는 이를 분명히 규명하고자 한다. 물론 친일분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근대 군사 교육 기관이 그곳밖에 없어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비록 일제 전쟁에 투입되기는 했지만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었다.
조선의 일본 육사 출신은 총 114명이지만 중국은 열 배가 넘는 1240명이며 필리핀·태국·버마 출신도 40~50명씩 된다. 장제스는 중일전쟁시 일본 육사 출신으로 구성된 막료들과 함께 대일 전쟁을 벌였으며 우리의 경우 이갑·노백린·김일성(김광서)·어담·유동열·지청천(이청천) 등 항일 투사들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 포츠담 회담과 무조건 항복 비밀 교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반도를 패전의 희생물로 삼으려 한 것이 그들의 술책이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