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의 우익 집단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한마디로 분단의 책임이 있는 자들의 가소로운 모습이다. 나는 일본이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음을 내 경험과 역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내 수기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2001년 5월 간행)에서 나는 ‘본인은 1945년 7월 패전 직전의 일본이 소련을 중계로 하여 자국에 유리한 무조건 항복을 교섭 중인 것을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주권도 대표권도 없는 우리 조국은 국토와 민족의 분할을 당하고 말았다’고 썼다. 그 배경은 이렇다.
1945년 일본 패망 20여 일 전의 일이다. 일본 항공사관학교 본과생이었던 나는 실전 훈련을 위해 만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차 훈련반은 7월30일 만주로 떠났고 내가 속한 2차는 8월30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일본에서 훈련을 갖지 못한 것은 미군 공습을 견뎌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같이 학교 앞 야산으로 가서 대피 방공호를 팠다. 그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새벽에 나가 오후 늦게까지 굴을 파고 돌아오면 생도들 모두 파김치가 됐다. 오합지졸의 신세로 대오도 갖추지 못한 채 돌아오는 모습은 바로 패잔병 그 자체였다. 이를 지켜본 사토 구대장이 우리들을 불러 놓고 호되게 꾸지람을 했다.
“이게 뭔가. 지금 일본 제국은 소련을 내세워 무조건 항복을 교섭 중이다. 나라의 운명이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은데 기강이 해이해져서야 되겠는가.”
정말 깜짝 놀랄 사실이었다.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다.
독일 항복 이후 고립무원인 일본이 미국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와 대만은 자기들이 갖는 조건을 내세워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와 대만은 태평양 전쟁 전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기득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이를 소련을 중재자로 내세워 교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43년 11월27일 카이로 회담은 루스벨트·처칠·장제스(蔣介石)가 참석할 만큼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커 대만을 차지할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대신 둘을 주장하다 하나를 챙기면 그것만으로도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그런 협상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이 회담에서 한반도는 독립시키고 대만은 중국에 귀속시킨다는 결론이 났다.
45년 7월26일 포츠담 선언에서 미국 측 대표인 트루먼은 일본의 이런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일본의 부탁을 받은 소련의 스탈린은 전세가 미국·영국 쪽으로 기울자 8월8일 재빨리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고 선전 포고를 하면서 곧바로 함경북도 나진·봉기·기륭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소련은 러일전쟁을 통해 사할린 네 개 도서를 일본에 빼앗겼지만 이보다 부동항을 갖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한반도 상륙을 더 큰 수확으로 여기고 있었다.
패색이 짙은 일본이 소련에 항복을 주선해 달라고 했을 때 그에 상응한 ‘선물’을 준비했을 것은 당연하다. 내 추측이지만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일부를 양보할 의사를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제의만으로도 소련의 야욕을 채울 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일본의 요청을 들어줘도 선물을 받고 적이 되데 전승국 자격으로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는 것이다.
한때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무적부대였다. 하지만 전선이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버마로 확대되면서 관동군의 대부분이 그쪽으로 투입돼 만주의 군대는 지리멸렬했다. 이때 소련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들어오게 된 것이고, 이것이 결국 한반도 분단의 단초가 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지만 카이로 회담을 통해 독립을 기정사실화했다. 대신 필리핀을 챙기고 일본 본토를 접수하는 것만으로도 수확은 대단한 것이었다.
본래 일본 패망시 규슈(九州)는 중국, 간사이(關西)는 영국, 홋카이도(北海道)는 소련이 차지하고 혼슈(本州)는 미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이 미국 단독 전쟁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송두리째 전리품을 챙기려 했던 것이고 이를 실현한 것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