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나 다름없는 C - 레이션을 황량한 구대장실에 보관하기에는 왠지 구색이 맞지 않을 뿐더러 누군가 훔쳐 갈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정정순 교육대장의 숙소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 며칠 후 나는 교육대장 숙소를 찾았다.
“정대위, 내가 침대 밑에 숨겨 둔 것 봤나?” “뭘 말이야?
정정순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침대 밑에서 C - 레이션 박스를 꺼내 초콜릿과 담배를 빼내 그에게 내밀자 “네가 나보다 낫다”며 한바탕 웃었다.
나는 동고동락하는 동기생들이 생각나 러키 스트라이크 세 갑을 챙겨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취침 중이었지만 나는 담배 한 개비씩을 뽑아 8명의 동기생 입에 물리고 차례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김재춘·손영을·박춘식·오보균(오일균의 동생) 등이었다.
그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생도도 있었지만 워낙 러키 스트라이크가 귀한 물건인지라 “쿨룩쿨룩” 기침하며 피워 대는 친구도 있었다. 아마도 낮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불난 줄 알고 교내 소방차가 달려왔을 것이다.
이윽고 교육대 수료식 날이었다. 나는 수료장을 받자마자 하사관실로 달려갔다. 이유 없이 내가 당한 만큼 김중사를 혼내 줄 작정이었다. 어느 부대, 어느 조직을 가나 인연이 닿지 않아 불편한 관계가 있는 경우가 있지만 김중사는 그 정도가 심하다고 보고 단단히 보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챈 선임 이등상사가 나를 가로막으며 “장형, 오늘만 참아 봐”하고 만류했다. 김중사는 그 사이 튀어 버렸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27일 오후. 공군본부 작전국장(소령)으로 있던 나는 마지막으로 수원으로 후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육군소위가 사무실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바로 1연대 교육대 시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김중사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타난 것이다.
경황없이 후퇴 준비 중인 데다 원수 같은 그를 만나자 속으로 섬뜩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김중사 아니오”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그랬다. 사실 할 얘기가 너무 많으면 정작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이기는 했지만 꼭 한 번 만나 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의정부 쪽으로 소대 병력을 이끌고 나갑니다. 인민군이 의정부까지 넘어왔습니다.”
그는 많은 사연을 눈으로만 말해 주고 곧바로 부하들을 이끌고 공군본부를 떠났다. 아마도 그는 나에게 지난날 가혹하게 한 것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말해 주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 후 세월이 흐를수록 나에게 가혹하게 했던 그가 그리워질 때가 많았다. 세월과 함께 원한은 스러지고 만나면 반갑게 대포 한잔 하고 싶었다. 그의 기합이 군생활의 좋은 지침이 되고 살아가는 지혜도 주었다고 생각돼 나는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나와 짧게 해후하고 의정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소식을 십수 년이 지난 뒤에야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으로 저며 오는 그리움과 슬픔을 한동안 지울 수 없었다.
교육대를 수료하고 1주일의 휴가를 마친 뒤 육사5기생(본래 명칭은 경비대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한 것은 47년 10월이었다. 구대장은 만주에서 군생활한 김동빈 대위였다. 그는 툭하면 구보와 산타기 훈련을 시켰다. 마땅한 교재도 없고 교육 커리큘럼도 빈약하니까 그저 산과 들로 생도들을 내몰았을 것이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어느 날 야간 훈련에 돌입했다. 산을 오르고 내를 건너고 다시 들판에 이르러 15분간 휴식이 주어졌다. 모두들 제자리에 앉는데 그곳이 바로 청무밭이었다. 누가 권하거나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너도나도 앉은 자리에서 무를 뽑아 먹기 시작했다.
겨울 무가 그토록 달고 시원한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바지에 문지르는 둥 마는 둥하며 네다섯 개쯤 뽑아 먹었다. 다른 생도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40명의 구대원이 그렇게 먹어 치웠으니 무밭이 온전할 리가 만무했다.
사흘 후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농부들이 쫓아와 군인들이 무밭을 통째로 작살내버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항의한 것이다. 육사 쪽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농부들은 발자국이 모두 군홧발이고 태릉 주변에서는 육사생도의 훈련밖에는 없다면서 범인은 육사생도라고 소리 질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