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66>제3話 빨간 마후라 -16-신혼의 단꿈과 암울한 미래

화이트보스 2009. 5. 23. 15:27
<266>제3話 빨간 마후라 -16-신혼의 단꿈과 암울한 미래

1947년 2월10일 나는 광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송광희양과 결혼했다. 전남여고를 나와 경성 여자사범학교 전문부 출신인 송양은 광주의 명문가 송진사의 손녀로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홀어머니가 유치원부터 여학교까지 송양과 함께 다녀 모녀가 개근상을 받는 교육열 높은 집안의 처녀였다.

내가 광주 서중학교 시절 마라톤 대회에서 1등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여학교 앞에서는 더 열심히 달렸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이것도 인연이구나 하고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일본 유학까지 가려고 했지만 홀어머니가 외로워하고 처녀 혼자 이국 땅으로 보내기가 걱정돼 광주에서 교편을 잡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 조신한 숙녀로 키운 가풍으로 생각했다.

나는 송양이 마음에 들어 별다른 데이트 없이 곧바로 청혼했고 만난 지 두 달 만에 식을 올린 것이다. 귀한 집 외동딸이 막내며느리로 들어오자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준 이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친딸처럼 며느리를 귀여워했다.

나는 젊은 아내를 집에 맡겨 두고 나주 시내의 큰형님(나주 세무서 직원) 집으로 나와 학교에 다녔다. 신혼 때부터 떨어져 살게 됐지만 토요일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날 때면 언제나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신혼의 재미로 어지러운 세상 분위기를 잠시 잊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진로 때문에 고뇌와 번민이 이어졌다. 불확실한 정국과 불확실한 미래. 결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암울하게 나를 짓눌러 왔다.

그해 4월 나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으로 광주 4연대장을 맡고 있는 정일권 대령을 찾아갔다. 그러나 부속실에 들어서자마자 부관이 내 신분을 확인했다.

“왜 연대장님을 만나러 왔나?”

“저는 일본 육사 출신입니다. 선배님인 정일권 연대장님이 고향에서 복무하고 계시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육사를 나왔다고? 근거가 있나?”

그러나 근거가 있을 리 없었다. 증명서를 휴대하고 다닐 필요가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런 것은 없는데요.”

“건방진 자식, 자격도 없는 놈이….”

부관이 문을 꽝 닫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완전히 문전박대였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분이 났다. 그래서 육사 예과 때의 사진을 들고 다시 4연대를 찾아갔다. 부관은 이때도 호락호락 면회를 시켜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와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밖의 소란스러움 때문이었는지 정연대장이 부속실로 나왔다. 나는 재빨리 정연대장 앞으로 나가 관등 성명을 댔다.

“육사60기 장지량 생도입니다!”

“그래? 들어와.”

의외로 쉽게 정연대장이 나를 연대장실로 안내했다. 부관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연대장의 명령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지 숨만 씨근벌떡이고 있었다.

“왜 나를 찾았나?”

“네, 시골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채병덕 1연대장님을 만나 뵈었더니 빨리 국방경비대에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워낙 정국이 혼미상태라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뭘 꾸물거려. 벌써 1~2기 선배들은 중위·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데. 시골 중학교 교사를 해 봐야 장차 산골 학교 교장하는 것이 전부 아닌가. 몇 달 후면 장교가 되는데 빨리 들어와.”

나는 마침내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6월 학교에 사표를 내고 전북 이리교육대에 응시 원서를 냈다. 필답 고사를 치르고 곧이어 면접시험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장지량 생도 아닌가?”하고 면접 담당관 중의 한 사람이 묻는 게 아닌가. 나는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면접실로 들어섰는데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은체한 것이다. 고개를 들자 육사 동기생인 조병건이 면접 담당관으로 앉아 있었다. 조병건은 벌써 전주 3연대 대대장(소령)으로서 교육대 시험 책임자로 파견 나와 있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