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65>제3話 빨간 마후라 -15-채병덕 대령과 김종석 대령

화이트보스 2009. 5. 23. 15:26
<265>제3話 빨간 마후라 -15-채병덕 대령과 김종석 대령

나는 육사 동기생인 이재일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물리·수학 연수를 받으러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로 출퇴근했다. 일과 후에는 이재일과 함께 서울 시내를 배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릉의 국방경비대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채병덕(일본 육사 49기) 선배가 1연대장(대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재일과 나는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국방경비대가 창설·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고 찾아 나선 것이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1연대 서울·경기, 2연대 대전, 3연대 전주, 4연대 광주, 5연대 부산, 6연대 청주, 7연대를 대구에 두고 신생 국가의 군인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가 창설됐지만 나라를 지키는 임무가 아니라 경찰의 치안 임무를 대신 맡는, 이른바 경찰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채연대장은 우리를 맞자마자 먼저 호통 쳤다. 커다란 체구에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그는 우리가 일본 육사 60기라고 소개하자 호탕하게 웃으며 “너희들 지금 뭘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고 이재일은 서울대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당장 나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아, 네가 뭘 안다고 선생을 해. 당장 집어치우고 경비대에 들어와!”
“그렇지 않은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도 있습니다.”
“안돼 이놈아, 당장 들어오라면 들어와!”

채연대장은 상대방을 좋아하는 기색이라도 이렇게 거친 말투를 썼다. 그는 후배인 우리를 극진히 아끼는 눈치였다.

“장군, 내려가는 길에 대전 거치지?”
“네.”

“그러면 잘됐다. 내려가는 길에 대전 2연대장 김종석 대령을 만나라. 잘 맞아 줄 것이다.”

말하자면 대전 2연대에 입대하라는 지시였다. 그래서 나는 연수회를 마치자 대전으로 내려가 김대령을 찾았다. 김대령은 일본 육사 56기로 일본군 대위까지 지냈으며 8·15 종전 후 3개월까지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전쟁을 치른 무훈이 뛰어난 장교였다. 당시 오키나와 남부에서는 김대위, 북부에서는 신응균 대위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있어 육사생이라면 모르는 생도가 없었다.

그는 나를 맞아 유성 온천에 데리고 가 따뜻한 점심 식사까지 대접했으나 본론으로 들어가자 얼굴이 굳어졌다.

“선배님, 서울에 갔더니 채병덕 1연대장님이 대전의 김연대장님을 찾아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교사직을 그만두고 경비대에 들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경비대에 들어와?”
그가 정색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경비대에 들어오지 마. 경비대는 모두 미국놈들 앞잡이야. 경비대는 미국놈들 하수인이란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경비대가 미국놈들 앞잡이라는 말도 처음 듣거니와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는데 들어오지 말라니. 서울의 채연대장은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들어와 힘을 보태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도무지 헷갈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귀로에 올랐지만 마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했다. 두 선배의 말이 너무나 상이하고, 그래서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막연했다. 특히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를 거듭하고 요인 암살과 좌우 대립이 격심해 절망감마저 들던 때였다.

고도처럼 시골에 박혀 혼자 고민하고 있자니 어떤 비애와 좌절감이 압박해 와 견딜 수 없었다. 이때 아버지가 나의 결혼을 서둘렀다. 나 역시 결혼을 통해 어떤 돌파구를 찾자고 생각하고 혼처에 관심을 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