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온 사람들에 따르면 평양의 김일성 장군이 뭔가 미심쩍다고 했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이 전설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장 김일성 장군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소문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의 김일성 장군은 나보다 37기가 빠른 대선배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최소한 58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평양의 김일성은 새파랗게 젊더라는 것이다. 갓 서른을 넘은 듯한 인물로 장군 타입보다 대중 선동의 정치가 모습이라는 소문이었다.
최주종 선배가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사 두고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내키지 않아 망설이다 끝내 나가지 않았다.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없는 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동태를 좀 더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나타나지 않자 최선배가 불같이 숙소로 달려왔다.
“이 자식아, 간다고 했으면 나와야지 대체 뭐야? 실없이 놀거야?”
“형, 그게 아니고….”
나는 처음으로 선배와의 약속을 어겼으나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선배는 내 앞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찢어 버리고 금방이라도 한 대 칠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평양에 갔다면 우리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시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격동기였다.
이런 운명의 갈림길은 또 있었다. 이재일의 집에서 숙식하며 함께 밤낮없이 서울 거리를 쏘다니자 일본 주오(中央)대 출신인 그의 형 이재남이 우리를 불러 꾸짖었다.
“이 녀석들, 이 중요한 시기에 술만 마시고 쏘다니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공부할 분위기가 아닌데요” 하고 내가 말하자 이재남 형이 “그럼 내일부터 내 사무실에 나와서 공부나 해. 세상이 변했으면 빨리 적응할 줄도 알아야지” 했다.
다음 날 나는 화신백화점과 광화문 네거리 사이에 있는 이재남 형의 사무실로 나갔다. 사무실 서가에는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그중 형이 관심 있게 읽어 보라며 10여 권의 책을 꺼내 주고 자신은 지방 출장 간다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들뜬 거리에서 조금 벗어날 마음과 자신을 추스를 각오로 책에 매달렸다. 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사’, 마르크스의 ‘자본론’, ‘레닌 전집’ 등이었다. 내용이 생경한 데다 나의 사상과 맞지 않아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흘이 지나는 사이 주머니 돈이 바닥났다. 숙식비로 맡긴 쌀도 떨어진 상태였다.
지방 출장에서 돌아온 이재남 형에게 용돈을 다시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고향으로 일단 내려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형은 남로당 선전부장이었다. 만일 형이 고향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계속 책읽기를 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고향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내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께서 반기기는커녕 “왜 지금 내려왔냐?” 하고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주 인민위원회에서 세 번이나 왔다 갔다. 너를 보안서장(경찰서장)으로 추대하겠다는 거다.”
“보안서장이라뇨?”
“광복되자마자 읍내에 인민위원회가 들어섰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주나 지식인들을 몰래 잡아다 몸에 돌을 달아 영산강에 빠뜨리고 있다고 한다. 난리다.”
아버지께서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면서 일봉암으로 가 은신해 있으라고 했다. 일봉암은 고향 마을에서 20리 떨어진 조상의 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산지기 집에서 밥을 지어 나를 테니 일봉암에서 시국을 좀 더 관망하든지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만일 내가 보안서장을 맡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역사의 순간순간을 작두날을 타는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