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63>제3話 빨간 마후라 -13-나주 민립중학교 교사

화이트보스 2009. 5. 23. 15:24
<263>제3話 빨간 마후라 -13-나주 민립중학교 교사

아버지는 나에게 지침을 필묵으로 써주셨다. 해방 공간의 격동기와 혼란기에는 절대로 선동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先動者는 망하고 末動者는 미급하고, 中動者는 산다’는 뜻이었다.

“얘야, 이런 때일수록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살아야 한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당시 주변에 얼마나 많은 개죽음이 산재했던가. 일봉암에서 은신하고 있을 때 산포면의 비옥한 농토를 경작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 다마이(玉井)가 몰래 아버지를 세 차례나 찾아와 “내 논 8만 평을 일본 육사 출신인 당신의 아들 이름으로 명의 변경해 주고 떠나고 싶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두 단호히 거부했다.

“당신네들이 착취한 땅은 모두 국가 소유다. 내 아들이 농토의 권리를 가질 이유가 없다.”

다마이는 내가 일본 육사를 다닌 것에 친근감을 가졌을 것이고, 언젠가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물정을 아는 내 소유로 해두면 도움이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당시 적산가옥이라고 해 일본인들이 소유한 농토나 주택 등 부동산·공장들을 문자깨나 아는 사람들이 자기 앞으로 등록해 부를 축적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아버지는 농토를 주고 떠나겠다는 일본인의 제의를 거부했던 것이다.

해방 조국에서 큰 일을 해야 하는 아들은 순결하고 단 한 점도 오점이 없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위야 어떻든 일본인 재산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오늘까지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1945년 11월 말의 일이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서울은 혼란상이 가중돼 무법천지가 돼가고 있었다. 나는 경성대(서울대) 진학을 꿈꾸고 일봉암에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육사 1년 선배인 홍승화가 갑자기 찾아왔다.

“나주 민립중학교 선생님들이 공석이래. 고향 후진들을 지도하러 나가자.”

해방 되자마자 인민공화국이 공포됐으나 미군정이 들어서고, 그래서 인민공화국은 불법화됐다. 이로 인해 좌익계 교사들이 모두 사퇴하면서 학교는 공백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나주 민립중학교 설립자는 광주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최일숙이었다. 최일숙은 고향의 후진을 기르기 위해 등록금을 거의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해 인근은 물론 광주의 수재들까지 몰려드는 명문학교였다.

그러나 최일숙은 좌익계였다. 자신이 운영하는 벽돌공장에 남로당 총책인 박헌영을 벽돌공으로 은신시켰던 사람이다. 최일숙의 영향과 박헌영의 입김이 작용했으므로 나주 민립중학교는 자연 좌익계 교사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자 좌익 활동이 봉쇄되고 이들은 모두 입산했다.

학생은 300명이었으며 교사진은 20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교사 대부분이 물러났으니 학교는 휴교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학교의 딱한 사정을 들은 나는 고향의 중학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과 후배들이 더 이상 향학의 꿈을 저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보니 교사는 나와 홍승화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 나는 수학과 물리를 담당하고 학급 담임도 맡았다. 나의 담당 학급 중에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똑똑한 아이들이 많았다.

신생 조국의 샛별처럼 이들은 밤에 잠을 잘 때도 뇌리에 떠오르는 아이들이었다. 이중 정진기·한갑수·기웅섭 학생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으며 정진기 학생은 후일 매일경제를 창설했고 그의 외동딸 현희양이 나의 장남 대환과 결혼해 나와 사돈 관계를 맺는 인연을 쌓았다. 한갑수 학생은 국회의원·농림부장관을 지냈고 기웅섭군은 기업인이 됐다.

나는 매일 새 교재 작성은 물론 번역 등사까지 맡았으며 내가 맡은 수학과 물리는 일본 육사의 교재를 그대로 가져와 가르쳤다. 이러니 실력이 대학생 이상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신생 조국의 학생들인지라 그들도 향학열이 높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