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의 와중에서도 고향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는 컸다. 나주 민립중학교(나주중 전신)가 특수한 여건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적 좌익 성향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는 설립자 최일숙의 영향이 컸다.
최일숙은 오늘의 시각으로는 좌익계 인사였지만 당시로서는 항일투쟁가요 민족운동가였다. 엄혹한 일제 때 박헌영 등을 자신의 벽돌 공장에 벽돌공으로 은신시키고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백두산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는 항일 투사들에게 군자금을 보내 준 인물이었다. 그래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나주에 변변한 중학교 하나가 없다는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학교를 세워 거의 무상으로 교육시켰다. 전북의 전주와 전남의 나주를 일컬어 전라도라는 이름에서 보듯 일찍이 나주는 목사(牧使)가 있던 곳이다.
다만 조선조 말 단발령이 내려질 때 양반에게 상놈과 똑같이 상투를 자르라고 한다 하여 나주에서 극심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에 정부가 도청 소재지를 광주로 옮겨 버렸고, 그로 인해 개화의 신식 학교가 광주에만 들어선 반면 나주에는 중학교 하나가 서지 못한 것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선인들의 보수적 옹고집 기질로 나주 발전이 저해됐으며, 그래서 인재를 모두 광주로 빼앗겼다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최일숙은 사재를 털어 중학교를 설립하고, 그것도 사립이 아닌 전국 최초의 민립중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의 이념상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나주 사람이 세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민립중학교로 명칭한 것이다. 이런 설립 이념을 가졌으니 학풍은 민족주의적 좌익 성향이었으며 수재들이 근동에서 모여들어 학교의 위상은 드높았다.
그러나 미 군정이 좌익을 불법화하면서 학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최일숙도 행방을 감췄다. 나는 이념적으로 동조하는 편은 아니지만 최일숙의 애향심과 고향 청소년 교육에 대한 배려, 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고스란히 사회에 헌납하는 모습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해 준 계기가 됐다.
부임 2개월째인 1946년 2월.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승만 박사가 뒤늦게 귀국해 전국을 돌며 순회 강연을 벌이다 나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박사의 노선에 반발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이박사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은 이박사를 옹위하는 쪽으로 방침이 세워져 학생들의 반대 시위를 거칠게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나주 벌판으로 도망가다 이 중 두 명이 영산강에 빠져 죽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발상지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던 나주가 발칵 뒤집힐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청년 학생들이 죽은 학생 시체를 널빤지에 올려 메고 나주 중심가를 돌며 시위를 벌이자 시가지는 완전 무법천지가 돼 버렸다. 내가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사상적으로 무색무취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자중자애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담당이 물리·수학이라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해 다행이기도 했다. 열강만이 고향 후진을 위하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명감은 대단했다.
그러나 내 인생이 바뀐 계기가 왔다. 47년 1월 서울대(경성대학이 서울대로 개칭됐음) 이승기 박사 주최의 물리·화학 중등 교사 연수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년 반 만에 가 본 서울은 정말 가관이었다. 좌우 대결의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고, 나는 이런 이전투구 현장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 안도했다.
이승기 박사의 물리 강의는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학문의 길이 이처럼 오묘하고 깊은 것인가 해서 저절로 경탄이 나왔다. 특히 이승기 박사는 일본 교토(京都)대학 출신으로 최초로 나일론을 발명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였다(하지만 그는 48년 월북, 김일성의 지원으로 북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