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76>제3話 빨간 마후라 -26- 비행기 헌납 국민 모금 운동

화이트보스 2009. 5. 23. 15:35

<276>제3話 빨간 마후라 -26- 비행기 헌납 국민 모금 운동

각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투는 치열하고 공군력은 절대 열세이고, 그렇다고 미국이 전투기를 내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국민을 상대로 비행기 헌납 모금 운동을 벌일 계획을 수립, 김정렬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김총장도 이에 찬성, 경기·영남·호남·중부 지역으로 나눠 장교단을 구성해 순회 강연회에 나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을 돌았는데 뜻있는 지주와 공무원·학생들이 적극 호응해 두 달 만에 비행기 10대 값을 모금할 수 있었다. 공군 장교단도 월급의 상당액을 내놓았다.

모금한 돈으로 비행기를 사겠다고 미국과 교섭하자 그들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군사 원조가 아니라 판매까지도 거부했다. 제주4·3 사건, 여순 사건, 강·표 월북 사건, 대구 폭동, 포항·울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들은 우리를 동맹 관계로 보기보다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공군은 결국 비밀 무기상을 통해 캐나다로부터 훈련기 AT - 6 10대를 구입했다. 서울 1호기, 부산 2호기, 대구 3호기, 광주 4호기…. 이런 식으로 10대의 이름을 붙여 1950년 5월14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참석 하에 비행기 헌납식을 가졌다. 이날 김총장과 최용덕 장군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공군으로서는 고무되는 행사였지만 그래도 항공력은 여전히 빈약했다. 그래서 또 묘안을 짜냈다. 중국에 있는 미 공군 시놀트 소장을 초청키로 한 것이다. 장제스(蔣介石)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대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의 취약한 공군력을 보강하기 위해 시놀트 장군을 초청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시놀트 장군이 서울에 왔다. 공군은 나에게 영어로 브리핑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나는 철저히 브리핑에 대비했다. 그 결과 브리핑은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시놀트 장군의 답변은 의외였다.

“나에게 그런 권한이 없소.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결정할 문제요.”

불과 6·25전쟁 두세 달 전의 일이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북한이 얼마든지 오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이명오 소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9년 6월 비행대대 2중대 선임 장교로 있던 나는 L - 4기 엔진을 교체한 뒤 시험 비행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이때 보급 장교 이소위가 나에게 다가왔다. 비행장에서 근무하는 공군 장교지만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보지 못해 가족들에게 말발이 안 선다며 시험 비행 때 자기를 한 번 태워 달라고 했다. L - 4는 조종사 뒷자리에 한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돼 있고 대체로 탑승을 희망하는 공군은 태워 주고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응낙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수송부의 김정호 상사가 달려왔다. 내가 전주 3연대 소대장으로 있을 때 항공대로 전보되자 따라오겠다고 간청해 데리고 온 부하였다. 사람이 성실하고 순종적이어서 여건만 되면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역시 비행 부대에 있으면서 비행기를 타 보지 못해 친구들한테 자랑도 못하고 있다면서 한 번만 태워 달라는 것이었다.

“장 선임 장교님, 장교들은 언제든지 탈 수 있지만 우리는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 저 먼저 태워 주십시오.”

말하자면 경합이 붙은 셈이었다. 나는 김상사의 말에 이끌려 이소위에게 “장교는 언제든지 태워 줄 수 있으니 이번에 김상사에게 양보하라”고 달랜 뒤 김상사를 태우고 시험 비행에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38선에서 강·표 월북 사건이 터졌다. 대대 병력이 월북해 버렸으니 병사들이 돌아오도록 선무 작업을 해야 했다. 마침 육군이 삐라를 만들어 38선에 살포해 달라고 가져왔다. 나는 이미 시험 비행을 했기 때문에 순서상 일본 소년 비행병 출신인 박용호 상사가 비행기를 탔다.

이때 이소위가 삐라를 뿌리는 사람으로 나섰던 모양이다. 자루에 담은 삐라를 조종간 뒷자리에 앉아서 지상으로 뿌리게 돼 있는데 이소위가 이 일을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소위는 38선 상공에서 삐라 자루를 그대로 떨어뜨리고는 박상사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월북하도록 위협했고 박상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소위가 없어진 뒤 그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월북 도상 계획서를 발견하고서야 내막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만일 김상사 대신 이소위를 탑승시켰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인간의 운명이란 이처럼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김상사가 나를 살린 셈이었다. 그런데 김상사는 한 달 후 뜻하지 않게 죽고 말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