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사진) 선생은 내가 문안 인사를 드리면 막내아들이 온 것처럼 반기면서 “영리한 개가 내 친구가 됐어”하시며 진돗개에 대한 안부를 전해 주셨다.
하기는 경교장에는 가족이라고는 단 두 부자뿐이고 대부분 정치인이나 당원들이 찾아와 비분강개하거나 때로는 정적들의 위협을 받다 보니 마음이 고달프고 심신은 지치셨으리라.
분단만은 막고자 남북 협상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노 애국지사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비통해하고 있는데 이때 귀엽고 영리한 개가 들어오니 그나마 위안이 되셨으리라 생각한다.
그 무렵 우리는 5인조를 결성해 형제처럼 지냈다. 나를 포함해 김신·장성환(와세다대 출신으로 학병으로 나가 항공병과에서 전투기 조종·전 공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 중대장, 신유협(공군준장 예편), 김영재(장제스 총통 전용기 정비 장교 출신·대령 예편) 대위가 바로 5인조다. 5인조는 가족끼리도 자주 만나 회식을 하고 애경사를 함께했다.
김영재 대위는 중국군 19집단사령부 참모처장 출신인 김홍일 장군의 조카로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김구 선생이 제조한 도시락 폭탄을 직접 윤봉길 의사에게 전달해 준 주인공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우리를 맞으면 더욱 감회가 깊은 표정을 지으시며 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앞으로는 하늘을 단단히 지켜야 할 것이야.”
미래를 내다보는 이런 정신으로 임시정부 시절 김신 중대장을 중국 항공사관학교에 입교시키고 태평양 전쟁시 미국으로 보내 미군 정예 비행학교에 입교시켜 한국인 최초로 F - 51기 훈련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은 우리 5인조가 찾아가면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은 듯 좋아하셨고 우리가 20대 젊은 장교들이기 때문에 술은 적게 먹고 공부를 많이 해 둬야 장차 나라의 재목이 된다고 격려해 주셨다. 그중 김신 중대장과 내가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자 더욱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 주시곤 했다.
김신 중대장과 특히 가까웠던 것은 간접적이나마 김구 선생이 가교 역할을 한 측면도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 재학 시절 경기중 출신의 이재일군과 함께 교정의 숲을 거닐면서 해방 조국의 미래를 그리며 국가 정체를 왕정이냐, 공화정이냐, 총통제냐, 황제 제도로 할 것이냐를 점치고 영도자는 김일성(김광서) 장군이냐, 영친왕이냐, 이승만 박사냐, 김구 선생이냐를 그렸다.
그중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김일성 장군과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꼽았는데 해방이 되자 김일성 장군은 전설로만 남고 대신 김구 선생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 조국의 영도자로 점쳤던 주인공을 직접 뵙고 또 선생이 나를 자식처럼 아껴 주니 감개무량하기만 했다.
김구 선생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곡히 부탁하면 글씨를 써 주시곤 했는데 나는 곁에서 먹을 갈아 드린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글씨를 받을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휘호라도 한 장 받아 둘 걸 하는 아쉬움이 크다. 먼 훗날 모임에서 김신 장군을 만나 그때 휘호를 받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면 “수십 장도 받을 수 있었는데…” 하시며 애석해하신다.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49년 6월29일 낮이다. 김신 중대장은 옹진 전투에 투입돼 옹진 비행장에 가 있었다(당시 옹진은 38선 이남에 있었음). 여의도 비행대대로 서거 소식이 날아왔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무전 교신이 안돼 부랴부랴 다른 비행기가 가서 알리고 김신 중대장은 해질녘에 비행기를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구 선생의 추모 인파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지만 혈육인 아들의 아픔만큼만은 못했으리라. 인품으로나 애국충정으로나 나라를 바르게 인도하고 가실 줄로 알았는데 흉탄에 쓰러지시니 나의 가슴도 무너지는 듯했다. 우리 5인조는 상주인 김신 중대장 곁에서 내내 빈소를 지켰다.
김구 선생을 떠나보내면서 김신 중대장 못지않게 슬픔을 가누지 못했던 나로서는 지금 서재에 선생의 깊은 뜻이 담긴 친필 액자 하나 걸리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회한으로 남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