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79>제3話 빨간 마후라 -29- 잃어버린 사람들(1)

화이트보스 2009. 5. 23. 15:36

<279>제3話 빨간 마후라 -29- 잃어버린 사람들(1)

1949년 2월 육군항공대 비행부대 2중대 선임 장교로 있을 때다. 비행대장인 김정렬 대령은 김포 비행장 외곽에 세운 항공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전보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김교장이 급히 나를 불렀다.

항공대 간부들은 김포 비행장 인근 미군 공병대가 철수한 뒤 비워 둔 퀀셋과 장교용 주택 100여 동에 거주하며 김포 비행장·여의도 비행장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나는 장교용 주택에 입주해 아내와 장모·친모를 모시고 비로소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 중이어서 장모·친모가 모두 올라와 계셨다.

나는 다급히 김교장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교장 관사로 뛰어갔다. 그러나 김교장은 내가 들어서도 “왔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김교장 앞 소파에 가 앉았다. 그래도 김교장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침묵은 20분 가량 지속됐다. 몇 년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숨이 막힐 것 같아 내가 먼저 무슨 말인가 해야 했으나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당시 조종사 건강 문제를 심히 따졌기 때문에 공연스레 내 건강을 따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 모든 것에 관해 나는 완벽했다. 김교장이 나를 혈육처럼 아끼고 신뢰한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입증되는 문제였다.

그래도 도무지 질식할 것 같아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여전히 김교장은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저는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해가 있으시면 푸십시오.”

그제서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으냐?”

“네?”

“어젯밤에 박원석이가 잡혀 갔다. 그 뒤를 이어 홍승화도 잡혀 갔고….”

박원석(일본 육사58기·전 공군참모총장) 대위는 항공사관학교 교수부장으로 근무 중이었고 홍승화(일본 육사59기) 소위는 항공비행단 정비 장교로 근무 중이었다. 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나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것이 김교장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박원석과 홍승화가 잡혀 갔습니까?”

김교장은 대답 대신 왼쪽 팔을 들어 보이더니 “이거라는 거야!”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왼팔은 ‘좌익’이라는 뜻이었다. 좌익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김창룡의 무시무시한 특무대(CIC)에 좌익으로 몰려 잡혀 가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러나 나는 웃음부터 나왔다. 박원석은 몰라도 홍승화는 너무나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그가 좌익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좌익 근처에도 가 본 사람이 아니었고 때로는 그들을 비난한 사람이었다. 물론 우익도 잘못한 점을 비난했다.

고향 1년 선배이자 일본 육사 선배이기도 했던 그는 해방되자 서울대 진학을 위해 고향의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를 불러내 나주 민립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도록 했다. 그리고 전주여학교로 전근 가서도 나를 데려가려고 했던 교사 출신으로 뒤늦게 군에 합류한 사람이었다. 정의감이 강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티라면 티일지 몰라도 그것이 또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장교였다. 그런 홍승화가 잡혀 갔다니 웃음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김교장의 다음 말에 나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교장에 따르면 전날 밤 그 무시무시한 김창룡 특무대의 이한진(육사5기) 대위가 일단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박원석 교수부장을 체포해 갔다고 했다.

박 교수부장은 끌려가면서 김교장을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해 곧바로 교장 관사 앞에 왔는데 그 광경이 끔찍했다. 특무대원들은 박 교수부장을 땅바닥에 눕혀 놓고 군홧발로 머리를 밟은 채 김교장을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빨갱이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

김교장이 소리쳤으나 특무대의 이한진은 자신 있다는 듯이 “남로당 군사 조직표에 나와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남로당 군 계보를 캐냈는데 이 자는 바로 박정희 밑 세포입니다”하고는 곧바로 끌고 갔다(김정렬 회고록 116페이지 ‘박정희 소령의 고난’편 참조). 그로부터 한두 시간 후 홍승화도 체포돼 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