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04>제3話 빨간 마후라 -54-잊을 수 없는 사람-김금성·이기협

화이트보스 2009. 5. 23. 15:58

<304>제3話 빨간 마후라 -54-잊을 수 없는 사람-김금성·이기협

유치곤 중령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나 역시 괴롭고 처연했다. 전투 조종사의 기질이란 비행기를 타고 나갈 때의 짜릿한 쾌감과 사나이로서의 기개, 무한히 하늘을 날면서 갖는 생의 환희와 야망 바로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파일럿이 꿈을 안고 창공을 누비는가.

작전참모 임무를 주로 수행해 온 나도 시간만 주어지면 출격해 F-51 34회, T-6 89회, L-4·L-5 68회 등 총 191회 출격 기록(2800시간 비행)을 갖고 있었다.

사선을 넘나든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파일럿의 꿈을 한없이 펼치는 기쁨으로 비행기를 탄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대한민국 공군 사상 최다 출격 기록(203회)을 갖고 있는 유중령이 더 이상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장님,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게 해 주십시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 시력을 상실한 그를 계속 비행기를 타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참 생각 끝에 말했다.

“나하고 약속할 것이 하나 있다. 약속하겠나?”
그는 나를 믿고 있는지라 무조건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비행기를 태워 주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절대 단독 비행은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부조종사와 함께 타라.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유중령은 눈물을 거뒀다. 그 조건 하에서 그는 2인승인 T-6·T-33기(제트 훈련기)를 계속 탔다. 그런데 내가 공군참모총장을 마치고 에티오피아 대사로 나가 있던 1969년 가을 그가 순직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전투기 훈련 중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평생 비행기밖에 모르고 올바른 파일럿 정신으로 살아온 그가 저세상으로 가다니 도무지 현실같지 않아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이국의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지난 얼마 전 유치곤 전투 조종사를 기리는 공적비가 그의 고향 달성에 세워졌다. 지난 14일 공적비 제막식장에서 나는 김영환 단장과 유치곤, 나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이 행사 팸플릿에 수록돼 있는 것을 보고 한없는 슬픔과 그 옛날의 추억에 젖었다.

김금성 전투 조종사 역시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53년 7월10일 내가 10전대장 시절 김중령은 198회 출격을 기록, 200회 달성이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피아 간에 마지막 전투가 치열해 전투 조종사들의 출격 회수도 많았다.

그러나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워야 할 후배가 몇 명 있었다. 두세 번만 출격하면 100회를 달성하는 후배 조종사들을 보고 그는 자신의 200회 기록을 고집할 수 없었다. 적기는 이미 대파돼 한 대도 뜨지 못했고 적 지상군의 대공포만 피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어 활동은 안전한 편이었다. 그래서 기록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200회 기록 달성을 포기하고 후배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영웅주의 속성이 사나이들의 야망찬 덕목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자신은 스스럼없이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출격 198회는 200회가 아니라 2000회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록이라고 나는 평가한다. 버리면 버릴수록 채워진다는 말을 그는 말없이 가르쳐 준 진정한 파일럿이었다.

김포 11전투비행단이 창설되고 초대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자 나는 부단장에 김금성, 전대장에 유치곤 중령을 배치했다. 내 좌우 날개로 앉힌 것이다. 인정 많은 김중령은 그러나 69년 대구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그의 사망 소식 역시 내가 대사 시절 접하고 망연자실했다.

이기협 중령도 내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다. 소년비행병 15기 출신으로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그는 말수가 없는 대신 자기 직무를 깔끔히 처리하는 파일럿이었다. 일가붙이라곤 없는데 다행히 사천비행단 시절 인근 아리따운 처녀와 결혼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그는 유독 나를 친형처럼 따랐다.

그러나 이중령은 55년 미국 현지에서 F-86 전투기 훈련 중 추락사하고 말았다. F-86기를 도입하기 전 미 공군 기지에 가서 훈련받고 직접 비행기를 몰고 오는데 그는 마지막 팀으로 합류해 훈련 과정을 마친 단계에서 변을 당하고 말았다.

주미 대사관 무관으로 있을 때 비보를 접하고 나는 애리조나 주 미 공군 기지로 달려가 직접 시신을 거둬 고국으로 보냈다. 이국 땅에서 산 사람과 이별할 때도 가슴이 쓰린데 사랑하는 아우의 시신을 떠나보내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나이를 너무 일찍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