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도 김영환 장군의 행선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본부에 기념일 취소 요청을 하고 본격적인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 산골짜기에는 눈이 2∼3m씩 쌓여 도무지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바다에서는 해군 함정과 자선(子船)이 수십 대 동원됐지만 구조보다 험한 파도와 싸우는 꼴이었다.
나는 외부 전화를 모두 끊고 부대에서 숙식하며 수색에 나섰다. 강릉에 육사5기 동기생 친구가 있었다. 강릉시장의 아들인 그는 며칠 후 나의 집을 찾아 아내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꿋꿋이 사십시오”하며 조의금을 내놓고 갔다고 한다. 아내는 큰딸애와 아들을 안은 채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강릉 시내에는 한동안 내가 순직한 것으로 소문나 이런 조문이 몇 차례 더 있었다.
김장군의 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친 전보가 사천비행단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것은 나의 지시를 받은 작전참모가 전보를 치지 않고도 쳤다고 했는지, 극히 예외의 사항이지만 친 전보가 중간에서 증발했는지 둘 중 하나였다. 그중 사람은 좋으나 잘 덤벙대는 참모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다시 전보를 치는 것이 번거로워 치지 않고도 쳤다고 했을 개연성이 있었다.
거기다 김장군이 자기 소속 강호륜 작전참모를 대동하려고 했으나 강 작전참모가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두 시간이나 지체한 끝에 김두만 전대장을 대동하고 일몰이 가까워서야 출발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거기에 동해안의 폭설을 만난 것이다. 이래저래 운명적인 날이 된 셈이었다.
1주일이 지나자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다. 나는 도리 없이 상황이 끝났다고 보고 수색 작전을 중단했다. 강릉 앞바다 심해는 수천m 낭떠러지가 있고 해류가 빨리 흘러 비행기가 떨어져도 종이 조각처럼 구겨져 수백km 밖에서 흔적을 찾거나 아예 찾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축 늘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귀로의 쓸쓸함이란 어디에 비길 데가 없었다. 막막한 절망감이 엄습해 와 견딜 수 없었다. 수염은 멋대로 자라고 기르자고 말한 주인공도 없는데 기를 기분도 나지 않아 이발관에 가서 깨끗이 밀어 버렸다. 내가 집 현관으로 들어서자 앓고 있던 아내가 나를 멀뚱하게 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나야 나. 어디 가는 거야.”
그러나 아내는 이상한 신음을 내며 “귀신, 귀신”하며 도망가려고만 했다.
“이 사람, 나라니까.”
이렇게 말해도 뒤로 계속 물러서더니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나로 인해 두 번째 정신을 잃은 것이다. 기르던 수염도 없고 수염 기른 자국이 하얗게 드러나니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강릉 시내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로부터 조문까지 받았으니 살아 돌아온 나를 귀신으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내를 부축해 몸을 흔들자 한참 만에 눈을 뜨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내가 처량해 보여 나도 왠지 눈물이 났다. 눈물이 솟구치자 떠나 버린 김단장이 생각나 나는 봇물 터지듯 울고 말았다. 여태껏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쏟아지는 것이다.
김단장은 단순한 나의 상급자가 아니다. 내 공군 인생의 운명을 지워 주고 공군의 자긍심을 심어 주고 형으로서 고통보다 용기를 준 분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다 보니 상관에게는 껄끄럽지만 부하들로부터는 한없는 존경을 받는 군인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 변화가 있을 때 언제나 김장군의 꿈을 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공군참모총장이 됐을 때도 김장군 꿈을 꿨다. 내가 자리를 양보해 앉으라고 권하자 말없이 나를 굽어보고는 그냥 사라졌다. 이런 꿈을 근 30년 동안 꿨으나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김장군의 모친은 아들이 언젠가는 살아 돌아온다며 영결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의 유품 하나 찾지 못했으니 영결식도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모친의 개인적 사정일뿐 공적으로 아직껏 영결식을 못했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특히 당시 수색 작전을 벌일 때 공군본부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현장에 와 본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섭섭하게 생각하는 전우들이 있다.
나의 가슴에서 영원히 떠나보낼 수 없는 김영환 장군.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 인생도 덜 고단했을지 모른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