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09>제3話 빨간 마후라 -59- 미 대사관 무관 시절

화이트보스 2009. 5. 23. 16:03
<309>제3話 빨간 마후라 -59- 미 대사관 무관 시절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은 총장실을 찾은 나를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그러나 총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영환 장군 순직 이후 고생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인가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가족을 데리고 유성 온천이나 다녀오게.”

그러면서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돈 봉투라는 것을 직감하고 “이게 뭡니까” 하고 나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앉았다.

“잔말 말고 받아. 가족도 마음고생했을 거야.”

나는 총장의 배려에 감격한 마음으로 봉투를 받아 들고 그길로 가족을 이끌고 유성 온천으로 내려갔다. 사흘쯤 지났을까 본부에 들렀다가 사천훈련비행단으로 귀대하는 신유협 대령이 온천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가 불쑥 “자네 모르고 있었나?” 하고 물었다.

“뭔데?”

“주미 대사관 무관으로 간다는 결재가 돌고 있던데? 지금쯤 총장 결재가 났을걸.”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휴가 보낸 것이 그런 속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화가 났다. 나는 그길로 보따리를 싸 들고 대구 공군본부로 달려갔다. 그러나 최총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감싸듯하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네는 6·25전쟁 중 한 번도 전선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지? 공군 실전 지휘를 가장 많이 한 지휘관이고 말야. 더군다나 미 공군대 이수 성적이 대단히 좋아. 그러니 나를 보필할 사람이 필요해. 고문단과 대화도 잘되고 하니까.”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해 놓고 나를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렇구나.

장성환 장군이 임기 만료가 돼 귀국해야 하는데 나를 후임자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강릉전투비행단장 직무를 수행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다른 직으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순번으로 봐도 내 차례는 아니었다. 내가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 총장이 거듭 말했다.

“사실 공군 무관으로 보내는 일은 1월에 결정해야 할 사안이었네. 서열상 장성환 장군 후임에 김영환 장군이 가야 하는데 그는 ‘총장님, 보시다시피 저는 결혼 10년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습니다. 아내 혼자 놓아두고 만리 객지에서 서로 쓸쓸히 떨어져 산다는 것이 괴롭습니다’하고 재고해 줄 것을 요망하더란 말야.”

그래서 인정 많은 총장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어서 손을 보게”하고 곧바로 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도 무슨 이유를 댈까봐 4개월여 동안 극비에 부쳤다가 휴가를 보내 놓고 일사천리로 대사관 파견 작업을 진행한 것이었다.

당시 대사관 무관 복무는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자네가 고생 좀 하게. 우리 공군은 기종 개편을 비롯해 군사 원조 증액과 공군력 증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이런 것을 해결할 사람이 자네야.”

이렇게 나를 평가하며 적임자라고 하는 데는 거부만 할 수 없었다. 주미 대사관 무관은 장성급이 맡았으나 공군의 경우 내가 발령받음으로써 대령이 가는 이변을 낳았다. 당시 육군 무관은 장창국 소장, 해군 무관은 민영구 준장이었다.

1954년 6월 워싱턴 주미 대사관에 부임한 지 한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의 최초 국빈 방문으로 대사관은 북적거렸다. 경제·군사 원조가 주요한 회담 의제였지만 정전 직후 군비 증강이 더 큰 과제여서 육·해·공군 무관들은 더 세밀한 조사와 협상 의제를 짜느라 밤잠을 못 자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장성환 장군도 귀국을 미루고 나와 함께 대통령 방미 계획을 수립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