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도자가 건국 이래 최초로 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전쟁 복구는 물론 군사력 증강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런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국민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는 계기가 됐다.
대사관 무관 생활은 하루하루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월급(220달러)이 넉넉한 편도 아니다. 그것도 고국의 가족들에게 일부 송금하고 나면 불과 몇십 달러로 생활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성환 준장과 나는 어깨를 맞대고 밤잠을 설치며 공군 현대화 제안 계획을 수립했다.
마침내 이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공항에서 백악관까지 태극기가 펄럭이고 군사·경제 원조 협상 대표단도 대통령을 수행해 옴으로써 워싱턴은 한동안 ‘한국의 날’이 된 듯한 인상이었다. 육·해·공군 군사 원조에 관한 펜타곤 회의 대표로 육군은 정일권 참모총장, 해군은 손원일 제독, 공군은 김정렬 전 참모총장이 참석했고 합동참모본부회의 이형근 의장도 가세했다. 한국군 수뇌부가 모두 참석한 셈이었다. 경제 원조 대표는 백두진씨가 맡았다.
김 전 총장과 장성환 준장, 그리고 나는 우리 공군력 증강을 위해 제안서대로 협상에 임했다. F-86(제트 전투기) 1개 비행단(54대) 창설, 조종사·훈련기와 레이더부대 요원 양성을 위해 360명의 장교단이 미 공군 기지에서 교육받도록 하는 협상을 벌였다.
T-33(제트 훈련기) 1개 대대(18대), C-46(수송기) 1개 대대, H-19(헬기) 1개 대대 증강을 1954년 11월부터 57년까지 순차적으로 지원받는 협상도 진행했다.
이 밖에 국내의 레이더 부대(6곳)를 전부 한국 공군이 인수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그동안 매년 미 공군대에 6명의 공군 장교를 파견해 교육받도록 해 왔는데 시간과 비용 문제를 감안, 국내에 공군대를 개설(58년)해 교육토록 하고 이를 위해 창설 기간 요원을 군사 원조 계획의 일환으로 미국에 파견키로 했다. 자동적으로 우리 공군에 학교가 하나 생기는 셈이었다.
국내 비행장 활주로 개·보수 지원도 확약받았다. 김포 비행장과 광주 비행장이 군사 원조로 닦여진 대표적인 비행장이다. 이때 국내 기술진의 기술 취약으로 필리핀 기술자들이 비행장 공사를 맡았다. 지금 세계 제1이라는 우리 토목 기술 실력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내용이다. 내가 74년 주(駐) 필리핀 대사로 근무할 때 우리 기술진이 필리핀 공항과 1호 고속도로를 닦았다. 완전히 거꾸로 된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어쨌든 군사 원조 회담을 통해 우리 공군의 현대화 계획이 일괄 타결됐고 360명의 장교(조종사·통신·레이더·정비·수송기·헬기 등)가 교육받기 위해 도미했다. 나는 교육생들과 원활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연락 장교 보좌관을 한 명 배속해 줄 것을 미 군원 회담 책임자인 얼레스 준장에게 요청했다.
워싱턴과 기지 내왕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연인원 360명의 교육생 뒷바라지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연락 장교가 꼭 필요했는데 이것 역시 곧바로 응낙이 왔다. 물론 비용은 군사 원조로 전액 지불했다. 그들은 이처럼 합리적인 대안에 대해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