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11>제3話 빨간 마후라 -61-영화 ‘전송가’이야기

화이트보스 2009. 5. 23. 16:03

<311>제3話 빨간 마후라 -61-영화 ‘전송가’이야기

군사 원조 교섭을 통해 펜타곤이 비로소 우리 공군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6·25전쟁 중에도 최신예 전투기를 주지 않더니 전쟁이 끝나자 우리가 요청하는 대로 지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 주둔 초기 우리 공군에 대해 불신감을 가진 것은 장교들의 출신 성분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1947년 국방경비대에 이어 48년 공군이 창설됐을 때 한국 공군의 인적 자원은 일본군과 중국 독립군 출신들로 크게 나뉘었다. 이 중 대다수는 일본 항공대 출신이었다.

태평양 전쟁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에 치를 떨었다. 일본의 자살 특공 폭격기 부대 가미카제(神風)가 미국의 전함·전투기를 맹공격,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미군은 일본 공군에 대한 적개심이 유독 강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 출신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들이 일본 항공대로 참전, 미국과 맞서 싸웠으니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지금은 우방군이 돼 있다고는 하지만 좋은 인상이 비칠 리는 만무했다. 여기에 이명오 소위, 백 모 중사, 김성배 대위 등 조종사들이 비행기를 몰고 월북해 버리니 한국 공군을 사상적으로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갔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미 극동공군 정보대의 니컬스 단장은 우리 조종사 10여 명을 체포해 갔을 정도였다.

공군 초기, 미군에 한국적 현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른바 불신을 해소시킬 역량이 부족했던 것인데 다행히 6·25전쟁 후 군사 원조 협상을 통해 많은 대화를 하면서 그들이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게 됐고 그 결과 전폭적인 군사 원조를 얻어 냈다.

특히 6·25전쟁 중에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공군이 많은 전과를 세우자 그들도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이처럼 신뢰를 보내 준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성공적인 군사 원조 협상 타결로 주미 대사관 무관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 봐도 군사 원조 교섭은 내 일생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회상된다.

무관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던 55년 6월 미 공군 커넬 헤스 대령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연락을 받는 대로 펜타곤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헤스 대령은 6·25전쟁 동안 미 공군6146부대장(한국 공군 고문단장)으로 참전했는데 이때 나와 1년 가까이 사귄 사람이었다. 지금은 펜타곤 인사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펜타곤에 들어서자 헤스 대령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오랜만이오, 미스터 장. 나를 도울 일이 있소.”

그가 나를 찾은 것은 자신이 한국 고아들에 관해 쓴 수기 ‘전송가’(Battle Hymn)가 잡지에 발표되자 영화사에서 영화화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아 후송에 관여했던 내가 기술 자문역(technical adviser)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해야겠다는 설명이었다.

한국의 풍속과 정서를 자문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헤스 대령은 “한국과 미국을 위해 이 영화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한국 고아 3000명을 제주도·군산·목포 등 후방 지역으로 후송한 일이 있었지요. 그중 제주도의 황은순 여사가 고아들을 받아 미국의 원조 물자로 아이들을 기르고 있소. 미군은 전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의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과 아동들을 인도적으로 보살피는 데도 헌신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거요.”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