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13>제3話 빨간 마후라 -63- 할리우드에 한국 옷이 없다

화이트보스 2009. 5. 23. 16:04

<313>제3話 빨간 마후라 -63- 할리우드에 한국 옷이 없다

미국 영화 제작진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면서 영화 제작은 본격화했다. 그러나 출연할 한국 여배우를 찾는 것이 문제였다. 마땅한 연기자가 없는 것이다. 가장 인기 있다는 최은희는 10대였다. 언어가 해결되지 않는 등 록 허드슨의 상대역으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제작진은 한국 연기자를 포기하고 일본의 톱 여배우 야마구치(일명 리꼬냥)를 캐스팅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배일(排日)사상이 강한 이대통령이 이 소식을 알면 펄쩍 뛸 것이라며 반대했다. 한국 소재 영화를 일본 여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대통령 생각을 빌려 일소에 부친 것이다.

영화 제작진이 고심 끝에 다시 좋은 여배우를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마침 주미 대사관 행사에 초청돼 노래를 부른 옥두옥이라는 한국 교포 가수가 떠올랐다. 애국자 후손 폴 최의 부인인 그녀는 미모도 있고 노래와 춤 솜씨가 뛰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가 해결됐다. 나는 제작진에 옥두옥을 추천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크린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할리우드가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잔뜩 꿈에 부풀어 할리우드로 간 옥두옥은 탈락해 워싱턴에 귀환했어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2주 동안 할리우드에 머무른 것만으로도 워싱턴 교포 사회에서 화제가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과야 어찌 됐든 할리우드 물을 먹었다는 경력이 하나 추가돼 여기저기 파티장에 불려 다닌 것이다.

여배우는 인도 출신 미국인 안나 카슈피로 결정됐다. 할리우드 배우 중 가장 한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케 현장이 문제가 됐다. 로케 현장으로 제주도가 선정됐지만 비용 문제와 여러 가지 불편한 점 때문에 포기하고 할리우드 인근 애리조나 주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나는 제작 자문역으로 촬영 과정을 그들과 함께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맨 먼저 부딪친 어려움은 의상이었다. 고아들이 입은 옷이 단추가 여러 개 달린 중국의 전통 의상(누비옷)이었다. 한국 고아들은 본의 아니게 중국인이 돼 버린 것이다. 30명의 고아 출연자는 황은순 여사의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이었는데 대사는 없고 미군에게 껌·초콜릿을 달라고 달려들면서 친해지는 과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옷을 바꿔 주기 위해 할리우드 옷 창고에 가서 한국 옷을 찾았다. 수천 평이나 되는 창고에는 세계의 온갖 옷이 쌓여 있었지만 한국 옷은 단 한 벌도 없었다. 이처럼 할리우드에서도 한국의 존재 가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동양 옷은 일본·중국·인도·필리핀·인도네시아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옷감을 사 와 연필로 한복 본을 떠 바느질하도록 하고 저고리 옷고름과 단추는 내가 직접 달았다. 이처럼 영화에서 본 서투른 한복은 바로 내가 만든 것이었다.

‘전송가’는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지만 노약자·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미국적 휴먼 정신을 드높이는 영화였다.

‘전송가’가 크게 히트하면서 미국적 양식과 가치는 세계에 널리 전파됐다. 영화사는 알 먹고(미국적 가치 제고) 꿩 먹는(흥행) 셈이었다.

한 달 가까이 꿈같은 할리우드 생활을 보내자 군사 원조 협상의 하나로 공군 훈련 교육생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미군 기지와 오키나와 기지에서 훈련받는 교육생도 일부 있었지만 주력은 미국 기지에서 교육받았다. 이때 교육받은 훈련생들이 추후 한국 공군의 주역이 됐다. 역대 공군참모총장 출신만 해도 김성용·김두만·옥만호·주영복·윤자중 등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