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84>바다로 세계로! -14-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고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0

<384>바다로 세계로! -14-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고

해군본부의 통신 기능이 저하되고 정부도 피난을 서두르고 있었다. 더 이상 본부가 작전 지휘권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결정에 따라 27일 작전권이 진해 김성삼 통제부사령장관(뒤에 사령관으로 개칭)에게 이양됐다. 이 결정과 함께 본부 요원은 꼭 필요한 인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일선에 투입기로 했다. 지금 용어로 하면 ‘조직 슬림화’다.

인사국은 진해, 함정국은 부산, 통신감실은 부산과 진해, 경리국은 진해로 각각 흩어졌다. 해군의 모든 교육 기관을 통제해야 하는 인사국은 당연히 진해로 가야 하지만 함정국이 부산으로 간 것은 조선공사 등 중요 조선 시설이 그곳에 있고 민간 선박 동원 업무도 그쪽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통신감실이 부산과 진해 양쪽으로 나뉜 것은 부산에 제2지휘소를 만들기 위한 복안에서 였다.

작전국과 정보감실은 총장 직무대리 김영철 대령을 수행하기로 돼 나는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내려갔다. 정부의 전쟁 수행 지침을 통제부에 하달하고 연락을 취하는 일, 미국 대사관 무관부와 협력해 전쟁을 지원하는 업무 등을 작전과 정보 파트에서 맡았다.

미 해군과의 협조 업무 제1호는 우리 해군 함정 표지 문제였다. 미 해군의 오인 사격으로 우리 배 한 척이 침몰된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함정에 태극마크와 고유번호를 붙이도록 하고, 미국 측 요구에 따라 우리 해군 작전 해역을 37도선 이남으로 제한했다.

한국 해군의 획기적인 전력 증강도 이 업무 협조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 미 대사관 무관실을 통해 “극동 해군사령관 조이(Joy) 제독이 한국 해군 지원을 위해 루시(Roucy) 중령을 부산에 파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30일 김총장 대행을 수행해 즉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제1부두 미 해군 함상에서 열린 한미 해군 회담에서 김대행은 대형 함정과 군수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그 때까지 한국 해군에는 600톤급 초계정(PC) 몇 척밖에 없어 하고 싶은 작전이 있어도 단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 회담에는 진해 해군본부 상황실 책임자 이용운 중령이 출장와서 늘 배석했다. 뒤에 해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해상 작전에 정통해 아직 걸음마 수준인 한국 해군력의 실상을 미국 측에 소상히 설명하는 데 적임자였다.

이 회담의 결실은 컸다. 미국 측은 9월에 우선 2000톤급 PF함(프리깃) 두 척을 양도해 주었다. ‘61함’ ‘62함’으로 명명된 이 함선이 취항한 지 2개월 뒤에 ‘65함’ ‘66함’도 도입됐다. 62함은 뒤에 가벼운 사고 때문에 ‘63함’으로 대체됐지만 초계정밖에 갖지 못했던 우리 해군은 일거에 구축함급 함정을 네 척이나 갖게 됐다.

이 배들은 대잠 구축함의 일종으로 전쟁 기간 중 미95함대에 소속돼 일본 사세보를 모항으로 중요한 작전마다 참가했다.

이토록 부산과 진해의 일이 많아지자 해군본부는 대전 임시 국방부에 연락관실만 남기고 대부분 부산으로 내려갔다. 미 해군 고문관도 부산에 와서 동해와 서남해 봉쇄 작전을 어드바이스하고 있는 터여서 더 이상 대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해군 수뇌부가 모두 부산과 진해에 와 있으니 작전 지휘권도 더 이상 하부 조직에 맡겨 둘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7월9일부로 다시 해군본부가 그 권한을 회수했다. 6월27일에 넘겨 주었으니 꼭 열흘 만에 되찾은 셈이지만 국민 개개인이 모두 이동통신 수단을 가진 지금 시대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

200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