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85>바다로 세계로! -15- 인천상륙작전-1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1
<385>바다로 세계로! -15- 인천상륙작전-1

한국전쟁 기간 중 해군은 크고 작은 여러 차례의 작전을 수행했지만, 인천상륙작전만큼 극적이고 통쾌한 순간은 없었다. 우리 해군 단독으로 치른 대한해협 해전과는 달리 이 작전은 미군과의 연합작전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해군과 해병대에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준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길이 역사에 남을 일이다.

나로서는 이 작전에 앞서 인천 일대의 정보 수집을 위해 특공대를 이끌고 첩보 작전을 수행한 인연과, 손원일 참모총장을 수행하면서 참관한 작전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첩보 작전은 뒤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억부터 더듬어 본다.

인천상륙작전은 적에게 빼앗긴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탈환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의 운명을 구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수세에 몰린 한국전쟁을 공세로 전환시킨 군사적 의미도 컸다. 이런 결과는 누구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인천을 택해 보기 좋게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큰 작품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미국 정부에 보고하자 군 수뇌부와 정치인들 사이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군 최고 책임자인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셔어먼 해군참모총장 등이 모두 회의적인 의견이었다. 맥아더 스스로도 5000대 1의 도박이라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한국군이 밀리고 밀려 대구마저 위협받던 1950년 7월 맥아더 장군은 적의 허리를 끊어 버릴 서해안 상륙 작전을 구상했다. 이 구상을 보고받은 워싱턴 군부는 모두 찬성이었다. 그러나 상륙 지점을 인천으로 삼겠다는 후속 보고가 들어오자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첫째, 인천이 부산으로부터 450㎞나 떨어져 유엔군 병력을 분산시키는 결과가 된다. 둘째,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대 병력을 빼내면 부산이 위태로워진다. 셋째, 일본에 주둔 중인 미7사단 병력을 빼면 일본의 치안 유지가 어려워진다. 넷째, 상륙작전용 선박이 부족한 상황에서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 전선의 보급이 어려워진다. 다섯째, 인천의 지리와 지형 및 해상 조건이 너무 나쁘다.

이런 이유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육군과 해군 참모총장을 도쿄에 파견, 인천상륙을 재고토록 맥아더 장군을 설득했다. 유명한 8월23일의 도쿄 회의에서 미 해군 측은 전반적인 적정(敵情), 황해의 해상 조건과 인천 앞바다의 수로 사정, 큰 간만차와 높은 안벽(岸壁) 등을 이유로 인천은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대안으로 군산을 제안했고, 셔어먼 해군참모총장도 이 안에 찬성했다. 이 말을 다 듣고 난 맥아더는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뒷날 그는 이 발언을 “10만 명의 목숨을 구한 연설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는 무려 45분 동안 역설했다.

연설 요지는 북한군 대부분이 낙동강 전선에 고착돼 있어 인천 방어 태세가 허술하다, 적의 지휘관은 우리가 설마 그런 무모한 작전을 할 것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므로 기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천 앞바다가 간만의 차가 크고 안벽이 높고 갯벌 수로가 길고 구불구불해 작전하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난점을 극복할 방안은 있다. 군산은 인천보다 작전에 훨씬 유리한 곳이지만 상륙을 해도 보급선을 차단할 수 없어 적을 포위하는 효과가 없다, 이런 주장이었다.

10만 명을 구했다는 것은 부산 교두보에서 반격을 개시해 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려면 적어도 10만 명의 피해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