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지는 한 잎 꽃잎처럼, 거친 바다에서 새파란 목숨을 떨군 김창학·전병익 두 수병의 죽음 앞에서 전우들은 맹세했다.
반드시 이겨 이 원수를 갚으리라. 한식구 같은 유대감으로 엉켰던 전우들은 제대를 한 달 앞둔 전 이등병조의 죽음을 더 가슴 아파했다.
그는 애인의 사진을 품은 채 죽었다. 제대하면 결혼할 사람이라면서 가까운 전우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사진 속의 여인은 수수하지만 청초한 미인이었다.
김 삼등병조는 2003년 5월15일 전쟁기념관이 제정한 ‘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뽑혀 공식 현창됐다. 그 행사 때 경기도 평택 출신인 그의 누이동생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오빠가 전쟁에 나가 죽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는데 그렇게 훌륭한 군인이었다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녀는 옛 전우들 앞에서 그동안 쌓인 한을 토해 내듯 오빠의 전사를 큰 소리로 자랑스러워했다. 직속 상관이었던 최소위가 소장했던 얼굴 사진을 복사해 전해 주자 사진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울음을 참았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에 대한 처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아직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지도 않았다. 같은 전투 같은 배에서 전사한 두 사람의 처우가 이렇게 다르니 이상한 일이다.
부산항 지척에서 벌어진 대한해협 해전 상황이 종료되자 해군본부는 승리의 증거를 수집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백두산함은 전투 해역으로 되돌아가 적선 침몰의 증거를 찾는 수색 작전에 임했다.
그러나 적병들의 옷가지들과 기름띠 같은 간접 증거물은 몇 점 떠다녔으나 적선 침몰을 증거할 결정적 물증은 찾을 수 없었다. 600여 명의 병력을 태운 함선이 침몰하면 구명 보트나 라이프 재킷을 이용해 해상에 떠다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떠다니는 적병 군복과 기름띠로 보아 침몰로 인정한 백두산함은 본 임무인 묵호해안 상황 대처를 위해 함수를 돌렸다. 전사자와 부상자 처리 문제에 대해 본부에서는 “가까운 포항 기지에 내려놓고 서둘러 묵호로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두산함은 포항 외항까지 마중 나온 어선에 전사자 시체와 부상자를 인계하고 북상을 계속했다. 26일 오후 묵호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해안 마을은 평온해 보였다. 해안에는 인민군이 쓰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목선 몇 척이 떠 있을 뿐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인민군은 벌써 상륙해 산악 지방에서 본격적인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시각이었다.
본부 지시로 진해에 되돌아간 백두산함은 기지 내 공창에서 전투 중 부서진 조타실 등의 시설을 수리하고 즉시 인천으로 다시 출동, 그때까지 철수하지 못하고 있던 인천 해군경비사령부 요원 30명을 태우고 진해로 귀환했다.
그 뒤에도 동·서·남해를 누비며 백두산함은 수많은 작전과 전투 선봉에 섰다. 1951년 2월3일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 때는 승조원들이 특공대로 상륙, 인민군 전차를 노획하는 해군 역사상 보기 드문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대한해협 전투 전사자 두 사람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했다. 전투 1년 뒤인 51년 6월25일에는 당시 백두산함 승조원 전원이 두 영웅의 묘를 찾아 참배하는 기념 행사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길이 역사에 남게 됐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