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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질진법사-영기로 본 산하기행(계룡산3) 포스트 상세 정보

화이트보스 2009. 7. 26. 19:08

차질진법사-영기로 본 산하기행(계룡산3)

할머니신(神)이 넉넉한 사랑으로 품은 산

옥녀봉에 앉아 잡귀 다스리며 개벽세상을 향한 일성(一聲),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 계룡산 옥녀봉과 유성법당.

계룡산(鷄龍山·845.1m)은 여신(女神)이 관장하는 산이다. 그래서 계룡산의 주산(主山)도 옥녀봉, 즉 여성이다. 할머니 산신령이 옥녀봉에 앉은 채 왼쪽에 장군봉(將軍峰), 오른쪽으로 문필봉(文筆峰)을 거느리고 있다. 각각 무신(武臣), 문신(文臣)이다.

‘할머니’는 푸근한 호칭이다. 계룡산 할머니 신령도 인간세계의 할머니와 마찬가지다. 공포심이나 경외감을 자극해 인간 위에 군림하려드는 법이 없다. 치사랑은 바라지 않는다. 내리사랑에 만족할 따름이다.

사람이 죽은 게 신이라 이승에서의 품격과 습관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초혼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애를 먹는다. 사어(死語)와 고어(古語) 투성이라 이해하려면 진땀을 흘려야 한다.

계룡산 할머니의 인간시절 정체에 관해서는 모른다.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그런 것 알아서 뭣하게”라며 공(公)과 사(私)에 선을 분명히 긋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 산신(山神)은 요즘 인간보다 귀신을 돌보느라 더 바쁘다.

“꼭 20년 전(계룡산 아래 유성에) 국립현충원이 생긴 이후 산 사람 챙길 여유가 없어졌지. 나라 지키다 젊어서 죽은 혼들이 하도 많아서….” 호국 영령들은 탐욕스럽지 않아 한층 더 정이 간다는 것이다.


좌청룡(左靑龍)처럼 할머니를 보좌하는 무신은 신임이다. 270여년간 할머니를 모시던 장군봉의 전임 무골은 수년 전 천계로 축출됐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할머니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아, 그놈이 멀쩡한 사람을 스물다섯인가 죽였지 뭔가. 옥녀봉 아래 골프장이 들어설 때쯤 근처 마을 남자들을 죄다 없애버렸어. 좋은 땅 욕심이 많은 장군이었지. 제 명당이 파헤쳐지는 걸 보고 엉뚱한 데다 화풀이를 한 거야.” 문제의 골프장 마을에서 오랜 세월 구전돼온 화두와도 같은 암시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산에 불 들어오면 도망쳐라.’ 이 말에 숨은 뜻은 ‘골프장 공사가 시작되면 마을을 떠나라’는 예고였던 것이다. 비명횡사한 이들은 결국 장군신(將軍神)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마을에 눌러 앉은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소름이 돋았다.



계룡산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구, 오묘한 빛 등으로 인간을 시험하기도 한다. 연천봉(連天峰)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을 파자하면 ‘사백팔십이 국이(四百八十二 國移)’, 즉 ‘조선왕조의 명운은 482년’이라는 힌트다. (方=네모=四, 馬=牛=八十, 角=뿔=2개=二, 口+或=國, 禾+生=移)

갑사에서 금잔디 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에 터를 잡은 신흥암에는 ‘천진보탑’이라는 바위기둥이 있다. 이 탑의 꼭대기에서 영롱한 빛이 나온다. 물론 아무나 볼 수 있는 빛은 아니다. 신흥암은 불상 대신 천진보탑을 모시고 있다. 영기(靈氣)가 발달한 불가(佛家)의 스님들이 빛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계룡산에서 언뜻 소울음 비슷한 소리를 듣거나 호랑이 기운을 느꼈다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다고 자부해도 좋다. 왜구의 노략질로 폐허가 됐던 갑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큰 몫을 하고 죽은 소가 이따금씩 할머니의 자가용 노릇을 하고 있다. 갑사 공우탑(功牛塔)의 주인공인 바로 그 소다. 풍운아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몸소 마곡사를 찾았다가 김시습이 자신을 피해 절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 세조(世祖)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타고 내려온 소의 새끼다.

또 깊은 산속의 호랑이 눈빛과도 같은 ‘스기’를 감지하는 순간이라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려니 짐작하면 옳다. 연천봉 중턱 오누이탑의 건립 모티브를 제공한 그 호랑이다. 목에 걸린 비녀를 빼준 스님에게 처녀를 물어다준 호랑이다. 물론 호랑이의 호의와 무관하게 스님과 처녀는 평생 의남매로 지내며 불도를 닦았다. 좀 멍청하지만 사기(邪氣)는 전무한 호랑이인 만큼 겁먹을 필요는 없다.

계룡산에는 할머니 산신 일행만 있는 게 아니다. 온갖 잡귀잡신들로 우글거린다. 1983년 국가 차원의 정화사업으로 신도안 등지에 뿌리내린 귀신들의 보금자리 620여곳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뿐, 이들 귀신은 슬그머니 국사봉(國師峰) 쪽으로 자리를 옮겨 눌러앉은 상태다.


▲ 유성법당 여산신님.


신이 아니라 귀신이 절대다수다. 국사봉에서 산기도를 올리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체험담은 착각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기도에 몰입, 뇌파를 한껏 끌어올려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귀신이 머릿속으로 쏙 들어온다. 기도자와 귀신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찰나를 노리는 것이다. 스스로 신의 대리인이 됐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동자신(童子神)이 들었다는 사람 가운데는 “데리고 있는 동자신이 시원찮아 계룡산으로 가서 새 동자로 바꿔왔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신이 아니라 잡귀를 떠받들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正易)에 천착,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이치를 깨친 반인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金一夫·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계룡산은 이처럼 선비와 학자를 사랑한다. 계룡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전 유성(儒城)을 우리말로 풀면 ‘선비재’다.

계룡산은 ‘정도령’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후천개벽의 세상은 아직도 요원할까. 할머니가 웃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영안(靈眼)깨나 있다면서 청맹과니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구나.”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대덕 연구단지, 계룡대, 정부 대전청사가 보였다. 동시에 국가의 미래가 오버랩 됐다. 어느새 개벽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기사 출처 : 주간조선 (2005-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