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치료로 본 첨단 의료기술·신약들
호흡부전증으로 쪼그라든 허파꽈리 인공호흡기로 펴줘
지난 7월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폐렴 등의 증세로 치료를 받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태에 비상이 걸렸다. 특별한 이유 없이 혈압이 급속히 떨어진 것이다. 강심제를 투여해도 혈압이 올라가지 않자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에 뛰어들었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순간이었다.의료진이 심장초음파를 김 전 대통령의 가슴에 갖다 대자 혈액을 폐로 뿜어줘야 하는 심장의 우심실(右心室)이 박동하지 않는 것이 확인됐다. 심장 주치의 정남식 교수는 직감적으로 폐동맥 색전증(塞栓症)을 의심했다. 다리 정맥에서 응고된 핏덩어리(혈전)가 심장 쪽으로 흘러들어와 폐로 들어가는 동맥을 막아버리는 증세다.
의료진은 핏덩어리를 신속히 녹이는 혈전 용해제 'TPA'를 쏟아부었다. 그러자 막힌 폐동맥이 극적으로 뚫리면서 폐로 혈액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곧이어 혈압과 체내 산소 포화도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기적적으로 위독한 순간을 넘긴 것이다.
중증(重症) 호흡부전증으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았던 고령(85세)의 김 전 대통령이 호흡부전증을 이만큼 견디는 것은 본인의 투병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첨단 의료기술을 총동원한 의료진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다는 게 의료계의 평가다. 정남식(심장내과)·장준(호흡기내과)·최규헌(신장내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의료팀은 현재 김 전 대통령의 생명유지 치료를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첨단기술과 약품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병원 측은 전했다.
◆24시간 지속성 신장 투석
통상 신장 투석은 환자의 동맥에서 대거 혈액을 빼내 몸 밖의 투석기에서 노폐물을 걸러낸 후 정맥으로 넣어주는 방식이다. 4~5시간 걸린다. 짧은 시간에 약 5L(리터)의 혈액을 빼내는 이 방법을 혈압이 불안정한 김 전 대통령에게 적용하면 저혈압을 유발하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의료진은 김 전 대통령에게 동맥이 아닌 정맥에서 혈액을 천천히 빼내서 노폐물을 거르는 '24시간 지속성 정맥 투석'을 시행하고 있다. 혈압 변동 없이 안전하게 투석이 가능한 최신 방법이기에 요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사용 빈도가 점차 늘고 있다.
◆허파꽈리 펴주는 인공호흡기
인공호흡기는 단순히 산소를 폐로 뿜어주는 기능을 넘어 체내 산소 포화도와 폐 상태를 보면서, 자유자재로 산소 압력과 농도를 조절해 쓸 수 있다. 호흡부전증이 오면 산소를 흡수하여 혈액에 전달하는 허파꽈리들이 찌그러진다. 이때 인공호흡기에서 산소를 뿜어주는 압력을 최대 2배 가까이 순간적으로 올려주면, 바지 주름이 다리미로 펴지듯 허파꽈리들이 펴진다. 산소 흡수율이 올라가 체내 산소 포화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강력한 혈압 상승효과 약물
심장에서 나온 피는 혈압의 힘으로 뻗어나가면서 각 장기(臟器)에 골고루 퍼진다. 혈압이 떨어지면 산소를 품은 혈액이 장기에 도달되지 않아 곧 신체 기능에 손상이 온다. 현재 김 전 대통령에게는 '노르에피네프린' 계열의 강력한 혈압상승제가 투여되고 있다. 이는 혈관 수축 관련 핵심 수용체를 직접 자극하는 약물이다. '혈압 호르몬'을 자극하여 혈관을 쥐어짜듯 혈압을 올리는 약제 '바소프레신'과 함께 혈압 강화를 위한 최후 수단의 약물로 통한다.
◆표피 재생 약물로 욕창 치료
중환자 치료의 변수는 욕창(褥瘡)이다. 오랜 기간 누워 지내는 중환자의 등이나 엉덩이가 짓무르면서 생기는 피부 궤양을 말한다. 이를 통한 세균 감염이 병세를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욕창에는 표피 재생을 촉진하는 'EGF 약물'이 투여되고 있다. 대웅제약이 당뇨병 환자의 발가락 궤양 치료를 위해 개발한 스프레이 형태의 신약이다. 피부 재생을 도와 욕창을 빨리 아물게 하는 효과를 낸다. 장기간 체내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면 심장에서 먼 쪽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의 피부 조직도 점차 죽어간다. 이희호 여사는 뜨개질로 뜬 벙어리장갑과 양말을 김 전 대통령의 손과 발에 입혔다.
◆의식과 무(無)의식의 줄타기, 진정 치료
인공호흡기 튜브가 기관지에 들어가면 계속 사레들린 것처럼 괴로워 견디기 힘들다. 이 때문에 수면효과를 내는 진정제를 투여해 환자의 고통을 줄여준다. 환자가 잠자듯 편하게 숨을 쉬어야 인공호흡기 치료 효과도 좋아진다.
하지만 과도한 진정 치료는 혈압을 떨어뜨릴 수 있고, 뇌쪽에 병이 생겨도 모르고 넘길 수 있다. 따라서 진정제 용량을 절묘하게 조절하여 통증은 없애면서 가능한 한 병세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치료법이다. 때로는 진정제 투여량을 줄여서 의식 회복 여부도 확인한다. 김 전 대통령이 가끔 가족이나 측근과 눈으로 의사소통 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최후의 수단, '인공폐'
심폐기능이 완전히 손상돼 산소가 심장박동을 통해 돌지 못하는 단계가 되면, '체외 산소화기기'(ECMO)를 이용할 수 있다.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 기계가 여기에 산소를 입힌 후 다시 몸 안으로 넣어주는 방식이다. '인공폐(肺)'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산소를 품은 혈액을 몸에 다시 보낼 때는 마치 심장박동하듯 압력을 주면서 밀어넣을 수도 있다. 의료진은 김 전 대통령의 경우 비교적 심장 기능이 좋기 때문에 아직 'ECMO' 사용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