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전 대통령 서거>DJ 호남 발자취…호남 눈물을 닦아준 영원한 지도자
뉴시스 | 배상현 | 입력 2009.08.18 14:17 | 수정 2009.08.18 14:40
【광주=뉴시스】배상현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민주화의 산증인 등 각종 수식어 붙는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소외와 홀대로 점철됐던 `호남의 한(恨)'을 대변했던 김 전 대통령은 영남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 충청 출신인 김종필 전 총재 등과 대비되면서 '호남의 맹주'로 자리했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호남정치권을 호령했고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호남민과 함께 군부독재와 맞서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였기에 호남지역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의 발자취는 역력하게 남아있다.
◇호남민과 같이했던 민주화의 가시밭길
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있던 하루 전날인 5월17일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체포됐다.
5.18광주항쟁을 일으켜 정권전복을 꾀한 주모자로 낙인찍힌 그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 희생양이 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즉시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외치며 금남로에서 치열한 저항을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군법회의에서 내란음모, 내란선동, 계엄법 위반 등 7가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고, 우여곡절 끝에 무기징역으로 감형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신군부의 만행은 당시만 해도 폭도, 반란수괴 등의 온갖 정치적인 수사로 호남민을 압박했고, 그 강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김대중과 호남민을 더욱더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80년대 5.18광주민중항쟁과 6월 항쟁 등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화신으로 떠올랐다. 5.18이 폭도에 의한 내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고 5.18국립묘지화,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 제정 등 20여년의 험난한 여정속에 호남민과 김 전 대통령은 재평가됐다.
후에 신군부는 5.18과 김대중을 고리로 영.호남의 지역감정 조정 등 정치적인 음모를 강화해 결국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월의 어머니집 안성례 관장은 "김 전 대통령은 80년 5.18 내란음모 수괴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이후 87년 6월항쟁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된 뒤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해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했다"며 "묘역에서 통곡하시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호남발' 차세대 지도자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래 1958년, 1959년에 강원도 인제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1960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서 당선됐지만 1961년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7년 고생 끝에 얻은 국회의원자리가 사라졌다.
이후 1963년 제6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잇따라 당선된 뒤 민주당 대변인과 1971년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겨루게된다. 김 전 대통령이 호남 출신 대통령 후보로 첫 발을 내딪는 순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을 호남출신 대통령 후보로 낙점(?)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박 전 대통령이었다. 1967년 3선 개헌을 추진하던 공화당은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서는 김 전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두차례나 지원유세에 나서고 유달산 기슭에서 박 전 대통령 주재하에 국무회의까지 연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고 있다.
같은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일약 대통령감으로 급부상한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이같은 행보는 "박 대통령이 김대중을 이렇게 집요하게 쓰러뜨리려고 하는데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인물이다'라고 보고 그 싹을 자르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목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급기야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누르고 후보로 확정돼 이듬해 박 전 대통령과 겨뤄 94만여표 차이로 졌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될때까지 영원한 호남의 지도자이자 정치역정을 걸어오게 된다.
1971년 대선 이후 5월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때는 후보 지원유세를 위해 자동차로 옮기던 중 전남 무안에서 14t짜리 대형트력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하고, 1973년 도쿄 망명생활중 납치사건, 5.18 사형언도 등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면서 호남민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연민은 더욱 깊어진다.
◇호남 정치의 맹주
80년 5.18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호남민의 소외와 억울함속에 신군부에 의한 호남에 대한 집단따돌림과 맞물려 김 전 대통령을 호남정치의 맹주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든다.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평민당과 신민당,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등을 잇따라 창당하면서 5.18진상규명과 호남소외 타개 등을 위해 전력을 쏟는다.
1990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 3당이 합당하면서 유일하게 권위주의정권에 맞서 싸웠던 김 전 대통령은 노골화된 호남고립 정책을 타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하지만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한 김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하지만 3년만에 정계복귀해 1997년 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남민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미워도 다시한번'의 심정으로 몰표를 던져줬고, 김 전 대통령은 호남민의 한을 풀어줄 대통령으로 우뚝 서게된다.
3당 합당 이후 호남민은 그 어느때 보다도 똘똘 뭉쳤고, 김 전 대통령의 대권을 위한 도전에 화답하듯 호남민은 김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감정은 더욱 노골화되기도했다.
영남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청출신 김종필 전 총재와 더불어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한 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호남의 눈물을 닦아주고, 때로는 호남의 정서를 이용하기도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가졌던 강력한 호남맹주 자리는 "전라도에서는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 황색깃발만꽂아도 당선된다"고 말할 정도로 호남민의 강한 응집력으로 표출됐다.
이 때문에 호남고립화와 지역감정을 정치화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영남세력인데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의 원흉이 마치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부정적 시각을 가져오기도 했다.
◇'호남민 한(恨)'의 대변자
'호남의 한'을 대변하는 노래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은 80년대 호남을 연고지로 한 해태의 프로야구경기가 펼쳐진 광주무등경기장에선 클로징 노래였다.
단순히 목포출신 이난영이 부른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넘어 호남민의 소외와 홀대에 목포출신인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애절함과 함께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투쟁가(?)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호남민과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던 김 전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연결해 줬던 목포의 눈물은 절박함 그자체였다. 기난긴 터널속에 호남민의 한은 김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무기였으며, 애처로운 한의 노래는 결국 승리의 찬가가 되기도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 광주 금남로에는 눈물을 머금한 시민들이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장면은 이를 잘 대변해줬다.
하지만 호남민의 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외환위기극복과 남북관계개선, 인권향상 등 다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미완의 개혁을 더욱 완성하기 위한 호남민의 바램은 계속됐다. 이 역시 한과 접맥돼 있었다.
이같은 정서는 소외와 홀대, 비주류의 대명사였던 영남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줌으로써 김 전 대통령에게 보였던 애정을 다시 한번 노 전 대통령에게 쏟아 부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호남민의 한을 앞으로 누가 풀어줄 것인가. 호남에서 포스트 DJ가 누가 될 것인가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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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민주화의 산증인 등 각종 수식어 붙는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소외와 홀대로 점철됐던 `호남의 한(恨)'을 대변했던 김 전 대통령은 영남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 충청 출신인 김종필 전 총재 등과 대비되면서 '호남의 맹주'로 자리했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호남정치권을 호령했고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호남민과 함께 군부독재와 맞서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였기에 호남지역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의 발자취는 역력하게 남아있다.
◇호남민과 같이했던 민주화의 가시밭길
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있던 하루 전날인 5월17일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체포됐다.
5.18광주항쟁을 일으켜 정권전복을 꾀한 주모자로 낙인찍힌 그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 희생양이 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즉시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외치며 금남로에서 치열한 저항을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군법회의에서 내란음모, 내란선동, 계엄법 위반 등 7가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고, 우여곡절 끝에 무기징역으로 감형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신군부의 만행은 당시만 해도 폭도, 반란수괴 등의 온갖 정치적인 수사로 호남민을 압박했고, 그 강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김대중과 호남민을 더욱더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80년대 5.18광주민중항쟁과 6월 항쟁 등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화신으로 떠올랐다. 5.18이 폭도에 의한 내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고 5.18국립묘지화,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 제정 등 20여년의 험난한 여정속에 호남민과 김 전 대통령은 재평가됐다.
후에 신군부는 5.18과 김대중을 고리로 영.호남의 지역감정 조정 등 정치적인 음모를 강화해 결국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월의 어머니집 안성례 관장은 "김 전 대통령은 80년 5.18 내란음모 수괴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이후 87년 6월항쟁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된 뒤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해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했다"며 "묘역에서 통곡하시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호남발' 차세대 지도자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래 1958년, 1959년에 강원도 인제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1960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서 당선됐지만 1961년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7년 고생 끝에 얻은 국회의원자리가 사라졌다.
이후 1963년 제6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잇따라 당선된 뒤 민주당 대변인과 1971년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겨루게된다. 김 전 대통령이 호남 출신 대통령 후보로 첫 발을 내딪는 순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을 호남출신 대통령 후보로 낙점(?)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박 전 대통령이었다. 1967년 3선 개헌을 추진하던 공화당은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서는 김 전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두차례나 지원유세에 나서고 유달산 기슭에서 박 전 대통령 주재하에 국무회의까지 연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고 있다.
같은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일약 대통령감으로 급부상한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이같은 행보는 "박 대통령이 김대중을 이렇게 집요하게 쓰러뜨리려고 하는데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인물이다'라고 보고 그 싹을 자르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목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급기야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누르고 후보로 확정돼 이듬해 박 전 대통령과 겨뤄 94만여표 차이로 졌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될때까지 영원한 호남의 지도자이자 정치역정을 걸어오게 된다.
1971년 대선 이후 5월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때는 후보 지원유세를 위해 자동차로 옮기던 중 전남 무안에서 14t짜리 대형트력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하고, 1973년 도쿄 망명생활중 납치사건, 5.18 사형언도 등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면서 호남민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연민은 더욱 깊어진다.
◇호남 정치의 맹주
80년 5.18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호남민의 소외와 억울함속에 신군부에 의한 호남에 대한 집단따돌림과 맞물려 김 전 대통령을 호남정치의 맹주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든다.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평민당과 신민당,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등을 잇따라 창당하면서 5.18진상규명과 호남소외 타개 등을 위해 전력을 쏟는다.
1990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 3당이 합당하면서 유일하게 권위주의정권에 맞서 싸웠던 김 전 대통령은 노골화된 호남고립 정책을 타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하지만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한 김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하지만 3년만에 정계복귀해 1997년 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남민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미워도 다시한번'의 심정으로 몰표를 던져줬고, 김 전 대통령은 호남민의 한을 풀어줄 대통령으로 우뚝 서게된다.
3당 합당 이후 호남민은 그 어느때 보다도 똘똘 뭉쳤고, 김 전 대통령의 대권을 위한 도전에 화답하듯 호남민은 김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감정은 더욱 노골화되기도했다.
영남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청출신 김종필 전 총재와 더불어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한 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호남의 눈물을 닦아주고, 때로는 호남의 정서를 이용하기도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가졌던 강력한 호남맹주 자리는 "전라도에서는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 황색깃발만꽂아도 당선된다"고 말할 정도로 호남민의 강한 응집력으로 표출됐다.
이 때문에 호남고립화와 지역감정을 정치화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영남세력인데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의 원흉이 마치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부정적 시각을 가져오기도 했다.
◇'호남민 한(恨)'의 대변자
'호남의 한'을 대변하는 노래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은 80년대 호남을 연고지로 한 해태의 프로야구경기가 펼쳐진 광주무등경기장에선 클로징 노래였다.
단순히 목포출신 이난영이 부른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넘어 호남민의 소외와 홀대에 목포출신인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애절함과 함께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투쟁가(?)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호남민과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던 김 전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연결해 줬던 목포의 눈물은 절박함 그자체였다. 기난긴 터널속에 호남민의 한은 김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무기였으며, 애처로운 한의 노래는 결국 승리의 찬가가 되기도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 광주 금남로에는 눈물을 머금한 시민들이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장면은 이를 잘 대변해줬다.
하지만 호남민의 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외환위기극복과 남북관계개선, 인권향상 등 다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미완의 개혁을 더욱 완성하기 위한 호남민의 바램은 계속됐다. 이 역시 한과 접맥돼 있었다.
이같은 정서는 소외와 홀대, 비주류의 대명사였던 영남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줌으로써 김 전 대통령에게 보였던 애정을 다시 한번 노 전 대통령에게 쏟아 부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호남민의 한을 앞으로 누가 풀어줄 것인가. 호남에서 포스트 DJ가 누가 될 것인가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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