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9년 9월 4일, 청(淸)과 일본의 관리들이 북경에 마주앉았다. 청의 흠명외무부상서 양돈언(梁敦彦)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는 수년간 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간도에 관한 일·청 간 협약'(약칭 간도협약)과 '만주5안건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큰 거래'가 성사됐다. 청은 조선과의 오랜 분쟁거리였던 '간도 영유권'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일본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어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양국은 협약 조인 후 기념촬영을 할 만큼 내용에 만족했다.이듬해인 1910년 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 신채호 선생의 '만주와 일본'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청국과 일본 간 협약이 된 소문이 낭자하니, 더 사나운 호랑이의 태도를 가지고 사방을 엿보는 구미 열강국이 어찌 이 시대에 이익이 모인 만주천지에서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 마음대로 뛰놀게 맡겨두며, 또 어찌 동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의 활갯짓을 앉아서 보리오."
- ▲ 간도협약 조인 후 기념촬영.
일본의 간도 진출 의지가 노골화한 것은 1906년경이다. 그해 3월 29일 조선주둔군 참모부가 육군성에 제출한 '간도에 관한 조사개요'에 그 속셈이 드러난다.
"간도는 함북에서 길림(吉林)에 이르는 도로의 요충에 해당하며 물자가 풍부하다. 만약 우리가 공격을 취해 함북에서 길림 방향으로 진출하려고 하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과 러시아를 설득하는 일본의 외교술은 교묘했다. 미국은 정부보다 민간기업이 만주 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미국 기업에 투자 기회를 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러시아는 회령~길림 간 철도가 건설되면 자국 국경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일본은 '연해주 불침략'을 약속했다. 외교 정지작업이 끝나자 일본은 청 정부에 '간도 영유권 인정'이란 '당근'을 내밀어 협약을 성사시켰다. 조선이 배제된 '엉터리 국경'은 이런 배경에서 그어졌다.
간도를 개척한 약 10만명의 한인들은 졸지에 '자기 땅'을 잃게 됐다. 나라를 잃은 후에는 일본 경찰에 모진 핍박을 당했다. 하지만 간도는 한인 독립운동의 기지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