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스크랩] 통일벼와 보릿고개, 농민과 박정희 대통령.

화이트보스 2009. 9. 15. 10:53

이름도 생소한 “보릿고개”를 아는가?

 

양력 5~6월쯤이면 가을에 걷었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여름 곡식인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굶주릴 수밖에 없었고 이시기를 견디기 위하여 농민은 고리채나 장리쌀을 얻어 죽지 않고 살아 남아야 했다.

 

장리쌀을 아는가?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춘궁기에 벼나 쌀을 얻어 몇 개월 지난 가을에 무려 5할이나 되는 이자를 쳐서 벼나 쌀로 갚아야 하는 무서운 것이었다. 오죽하면 저녁죽 삼년이면 논이 서마지기라는 말을 했다. 쌀을 생산하는 농민이 보릿고개 한 달을 넘기기 위하여 가을에 수확을 하여 자본가나 지주에게 수탈을 당하고 굶어야 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농촌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의 악순환을 혁파하기 위하여 박정희는 5.16 혁명을 한지 한달 만에 농촌고리채정리법을 제정하여 수천년 내려온 농촌의 수탈과 폐악의 악순환을 뿌리 뽑았다. 전체 인구의 70-80%가 농사를 짓던 농업국가에서 농민이 굶주린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수천년 내려온 우리의 모습이다.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당시의 가난이고 굶주림이지만 배고픔과 보릿고개는 오천년이 지속된 숙명과도 같았다. 그러한 숙명적 가난과 배고픔을 물리친 것이 불과 몇십년 전이고 오천년 우리 민족역사에서 배고프지 않았던 기간은 고작 한 세대에 불과하다. 결코 지금의 풍요가 오래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30년 남짓의 엊그제 였다.

 

필자 역시 가난한 강원도 깡촌의 촌놈이고 나이도 많지 않은 관계로 인해 배고픔은 몰랐지만 어릴적 먹었던 것이 감자와 옥수수 범벅, 된장 풀어 감자와 묵나물과 쌀알 서너알갱이 넣은 토장죽, 그리고 눌린보리 쪄서 쌀과 섞어 보급하던 정부미를 지겹게도 먹었다. 하지만 배고픈 줄은 몰랐다. 우리부모님도 나에게 호강하는 것이라 했다. 그 말뜻을 몰랐다.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 싫었다. 세월이 지나 당시 먹었던 음식이 그리워 지곤 한다. 감자 범벅(감자 붕생이), 옥수수 범벅, 산나물 죽, 도토리 묵밥, 메밀묵밥 등등. 지금은 별식으로 통하고 웰빙식이라 각광을 받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양석이라는 말을 아는가?

 

논 한마지기(지방에 따라 틀리지만 보통 150평 -200평의 논)에 보통 벼 네가마니(쌀로 찧으면 두가마니)가 나오면 정상적인 소출로 보았고 농사도 비교적 잘 지은 소출량이었다. 네가마니 나오던 소출량이 어느날 갑자기 일곱가마니를 수확하게 되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혁명이었다.

 

수천년 내려오던 배고픔에 종지부를 찍는 우리민족 최고의 과학기술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숙명적 배고픔과 기아를 일거에 몰아낸 통일벼의 등장, 녹색혁명의 서막이었다.

 

통일벼에 개발에 얽힌 그 치열했던 사연을 아는가?

 

얼마 전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전국민 책 한권 쓰기” 운동에서 논픽션 대상 제1회 당선작 “ 애들아, 인제 괴타리를 풀어놓자구나”(괴타리 : 허리띠 충청도 방언임)에서 1968년 당시 이 완주(李抏周) 서울대 농학박사께서 수원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며 통일벼 품종을 개발했던 과정을 보며 옛 그 시절 있었던 통일벼에 대한 감상을 풀어 놓았다.

 

배고픔을 잊게 해준 통일벼가 세 번 울리고, 세 번 웃게 했다.

 

못자리에 싹이 안 터서 울었고, 벼가 붉게 변해 울었고, 맥없이 떨어지는 낱알 때문에 또 울어 그렇게 세 번 울었다.

 

하지만 비실거리던 모가 자라나 웃었고, 도열병에 안 걸리고 웃었고, 타작 때 벼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또 웃었다.

 

식량증산의 절대절명의 과제를 풀어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석학과 인재를 모아 농촌지도소를 만들었고, 획기적인 식량증산이 가능한 벼품종 개발을 지시한다.

 

식량증산을 위한 농촌지도소의 석학과 인재들은 죽어서라도 다수확 벼품종 개발을 해야 했다. 식량증산은 공업화로 가기 위한 기초적인 발판이었고, 쌀과 식량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으면 공업도 없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농,공 병진 정책은 포기할 수 없는 국가 정책의 근간이었다.

 

벼는 크게 japonica와 indica로 나뉘는데 우리가 먹는 일반적인 쌀은 모두 자포니카 계통이고 안남미로 불리우는 태국이나 인도에서 먹는 쌀이 인디카이다. 자포니카는 우리들 입맛에 맞고 밥맛도 좋지만 수확량이 적고 인디카는 밥맛이 없지만 수확량이 많았다. 하지만 인디카의 치명적 약점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자랄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가지 특징을 가지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일본은 수십년 연구를 하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다.

 

통일벼가 사실은 단순한 벼품종 개선이 아닌 혼을 담은 절대절명의 치열한 연구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쌀 품종개량의 최고의 기술을 축척한 일본도 포기한 벼품종 개발은 일본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척박한 과학수준, 기술을 딛고 일어선 눈물겨운 노력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우리보다 모든 과학기술면에서 앞서 있는 선진국이었다. 통일벼 개발을 위하여 우리나라 석학들이 필리핀에 가서 기술을 전수 받고 배웠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문회 교수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초청을 받아 당시 최신의 벼 육종 기술을 배웠고, 7년의 뼈를 깍는 허문회 교수를 비롯한 농촌지도소가 연구와 노력으로 당시 최고의 벼 재배기술 및 연구가 축척된 선진국 일본이 포기한 자포니카와 인디카 교배를 성공시켜 통일벼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지난 7월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국가 연구개발 반세기 10대 성과 사례를 발표했다. 첫번째로 '통일벼 개발'이 뽑혔다.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하여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된 바로 이 '통일벼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혼을 담은, 뼈를 깍는 노력, 절대절명의 사명감이 어우러져 일구어낸 통일벼의 성공은 다양한 신품종 개발로 이어져 1977년 쌀 생산량이 ㏊당 4.94톤(일본, 4.78톤)으로 세계최고의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쌀을 자급자족함으로써 녹색혁명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현재 쌀재배 기술 및 품종개량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월드베스트 국가이다.

 

오천년 내려오던 숙명적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세계 최빈국, 일천한 기술력, 격동기를 거치며 만연된 패배주의, 절망스런 현실 등의 타성에 젖은 농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식량증산에 회의적이었다. 서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벼 한포기에 80-90알 열리던 낱알이 무려 120- 140알이 달렸다. 기적을 목도한 농민들은 숙명적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것에 환호하였고 “대통령 덕분에 이제 굶지는 않는 구나” 만세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식량증산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열정이 만들어낸 통일벼 그 쌀은 박정희의 의지의 산물이란 것은 부인 못할 것이다.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이 심어준 하면된다는 신념을 믿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이러한 열정과 진정성을 믿었다. 기꺼이 국민은 "배고픈 혼란" 아니 더 나아가서 "굶어 죽는 자유" 보다 "배부른 통제" 더 나아가서는 "미래와 희망을 위한 개발 독재"를 선택했다.

 

그 당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들이 선택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심없는 투신과 열정을 지금의 잣대로 부정해서는 아니 된다.

 

더군다나 당시 국민 80%를 차지하고 있던 숙명적 가난에 익숙한 농촌과 농민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 더욱 자신의 잣대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들의 선택과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겨웠던 처절한 노력을 폄하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출처 :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글쓴이 : 정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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