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으로 다시 본 의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러시아가 보낸 특별열차에 탑승해 1909년 10월25일 밤 11시에 장춘역을 출발해 북쪽으로 달려 이튿날 오전 9시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그가 대기 중이던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의 객차 내 영접을 받고는 20분 정도 뒤에 흰 수염을 날리며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대의 영접을 받았지만 이내 총성 여섯 발이 울리면서 역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토가 총에 맞은 것이다.
어찌할 줄 모르던 수행원들은 이토를 열차 객실 안으로 도로 옮겨 응급 처치를 시도했지만, 30분만에 절명하고 만다.
성균관대 사학과 구태훈 교수는 안중근과의 가상 대담 형식으로 안중근 일대기를 정리한 근간 '안중근 인터뷰'(재팬리서치 21)에서 이토가 안중근이 쓴 총에 맞고 절명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안중근에 대한 검찰 조서에서는 15분으로 돼 있다는 기록도 소개했다.
구 교수는 피격 후 사망하기까지 이토가 어떤 말을 남겼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토는 '누가 총알을 쏘았지?' 하고 물었고, 곁에 있던 비서관이 '한국인 청년이라고 합니다'라고 알리자, '그런가, 어리석은 놈'이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크다. 이토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총을 맞은 다음에 혼수상태로 있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대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24쪽)
구 교수의 추정대로 이토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망했을까.
무엇보다 절명하기 전 이토가 '어리석은 놈'이라고 했다는 출처의 원전을 철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수행했고, 안중근 의거를 눈앞에서 지켜본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1863-1911)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 궁내대신 비서관 신분으로 궁내성 명령에 따라 이토를 수행한 모리는 같은 해 11월15일 이 사건과 관련한 참고인 진술을 검사에게 했다.
이 참고인 진술서는 안중근 자신의 증언과 함께 그의 의거를 생생하게 증언한 제1급 자료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다행히도 그것을 필사한 자료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남아있다.
이 진술에서 모리는 안의사 의거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토 공(公)이 노국(露國.러시아) 군대의 우익에서 좌익을 향해 그 전면으로 여러 걸음 나가는 순간에 돌연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쓴 한 명의 사나이가 우리 거류민의 전후가 동요한 군집 속에서 나타나 홀연 공작(이토)의 배후로 다가가…급히 소지한 권총으로 공작의 우측에서 저격하기를 여러 발. 흰 연기가 출현하고 공작은 약간 신체를 지탱할 수 없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던 순간 수행원과 동행자들이 겨우 급변을 감지하고 공작에게로 달려갔는데…."
모리와 함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수행했으며, 역시 검사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참고인 진술을 한 사람으로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1847-1938)라는 당시 일본 귀족원 의원이 있다. 같은 순간에 대한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공작이 앞서 말한 외교단이 있는 곳에 이르러 악수를 끝내고 귀로를 향해 나아가 노국 군대 앞에 이르렀을 때 홀연 여러 발의 폭죽과 같은 소리를 들었으나 저격자가 있다는 주의를 하지 않았는데 잠시 있다가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의 사나이가 노국 군대 사이로 몸을 내어 권총으로 본인 쪽을 향해 발사하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저격자가 있음을 알고 곧 공작 곁으로 달려가 왼쪽 옆구리 부근에서 그를 안았더니 공작은 이미 부상했다고 말했다. 저격 당시 모습은 이 이상은 모른다."
돌발사태에 즈음한 이들의 반응은 당혹 그 자체였다.
그것을 모리는 "급변에 놀란 일동은 그 누구도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으며, 또 그 순간 대다수 사람은 무슨 진기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어나 러시아어는 몰라도 어떻든 그 순간에는 군중 속에서 이렇다 할 만한 동요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총탄 세례를 맞은 이토는 객실로 옮겨졌다. 그를 응급조치한 의사는 오야마 젠(小山善)이었다.
모리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절명했다.
오야마가 객실로 옮긴 이토를 옆으로 뉘고 외투와 조끼 등을 벗겨 상처를 고치고 주사를 놓았는가 하면, 종자에게 명해 브랜디 한 잔을 이토에게 권하니, 일시 흥분한 이토는 "누가 쏘았느냐"고 하기에 다시 브랜디 한 잔을 더 권하고 석 잔째를 권하니 이미 절명하고 말았다.
절명하기 전에 브랜디를 마셨다는 증언은 무로다도 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모리의 증언에 비해 더욱 생생하다.
"나는 달려가 그의 몸을 떠받치고는 '권총이니 염려없습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라는 말로 격려하니 공작은 상당히 (총알이) 들어가 글렀다고 말했으므로 곧 기차로 돌아가자고 (다른 수행원인) 나카무라(中村)와도 이야기하고는 부축해 기차로 데리고 가는 도중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면서 무로다는 이렇게 해서 이토를 기차로 옮기는 도중에 이토가 총을 쏜 자가 누구냐 물었으나 이때는 그것이 명확하지 않았으므로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객실에 옮겨 이토를 뉘고 나서 통역이 와서 "범인은 한인(韓人)이며 곧 포박했다고 보고하니 공작이 이 말을 알아듣고는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증언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무로다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이토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토가 절명하기 전에 보인 행동, 예컨대 총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적어도 숨지기 전까지 의식이 있었으며, 이 와중에 '바보 같은 놈'과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은 사실에 입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진술에 응한 두 사람 중 유독 무로다만큼은 이토를 죽음으로 몰고 간 총알을 쏜 사람이 안중근이 아니라 제3의 인물이라고 지목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무로다는 이토 몸에 박힌 총알 3개가 모두 위쪽에서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범인이 저격하는 것을 봤을 때 저격자(안중근)는 오른손에 권총을 잡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고 신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있음을 보았다"라며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 안중근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무로다는 더 나아가 "나중에 들은 바, 저격자는 7연발 총을 사용해 발사하고 1발이 남았다고 하므로 이 점으로 짐작하면 공작을 저격한 이는 이 사진에 있는 자(안중근)가 아니고 다른 자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격자가 공작을 쏘았을 때 다시 총을 바꾸어 쏘았다고 하면 별문제가 되지만 말이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이토 저격에 안중근 외에 제3의 인물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토를 죽음으로 몰고 간 총은 권총이 아니라 러시아제 카빈총이며, 저격 장소는 역사 지붕 같은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국내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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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역에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5번 인물)>>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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