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역사를 바꿨다. 만찬장이던 나동(棟) 안방에는 당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수뇌부가 집결해 있었다.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었다.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 둔 경호원 대기실에는 경호원들이 있었다. 경호처장 정인형(鄭仁炯)·부처장 안재송(安載松)과 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朴善浩)가, 밖의 제미니 승용차에는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朴興柱)가 대기했다. 50m떨어진 본관 1층 회의실에서는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수많은 역사의 산실(産室)이 됐다. 12·12사태, 신군부(新軍部)의 등장, 서울의 봄, 5·18, 국보위. 5공(共) 출범…. 한국현대사를 격랑(激浪) 속으로 몰고 간 '그때 그 장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1993년에 헐리고 '무궁화 공원'으로
"탕!" 총성과 함께 차지철이 팔을 움켜쥐고 일어났다. "경호원, 경호원!"(차지철) "뭣들 하는 거야!"(박정희) 김재규는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 밖의 박선호가 총소리에 맞춰 정인형과 안재송을 저격했다.
총이 고장 나 뛰어나온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을 낚아채고 돌아와 차지철을 쏜 뒤 쓰러진 대통령의 머리 50㎝까지 총구를 들이대고 '야수(野獸)의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건 발생지인 중앙정보부(중정) 안가는 청와대 남서쪽 효자로와 창의문길 교차로의 공원 자리에 있었다. 무전기를 든 요원 1명이 배치된 입구에는 '무궁화 동산'이라 새겨진 표지가 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취임 넉 달 뒤인 1993년 7월 안가는 헐리고 지금 같은 공원이 됐다.
②국군서울지구병원
이전논의 한창… 경호처는 난색
"군의관 있는 대로 다 나와! 이 사람 살려야 돼!" 7시55분, 경복궁 동쪽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군의관 정규형(鄭圭亨) 대위가 20분 동안 응급소생법을 시도했지만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넥타이핀의 도금이 벗겨졌고 혁대도 해져 있어서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서거'를 처음 확인한 이곳은 30년이 지난 지금 이전 논의가 한창이다. 이곳과 인접한 건물은 10·26 당시 전두환(全斗煥) 소장이 수사를 지휘한 옛 보안사령부다. 그 후신인 기무사는 지난해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갔다.
올해 초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이 병원과 옛 기무사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와 5분 거리인 '대통령 전용 병원'이라는 점 때문에 경호처가 난색을 표했다. 당분간 병원과 미술관은 공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③삼일고가도로
2003년 철거… 흔적 찾을 수 없어
총성이 울린 지 2~3분 뒤 맨발로 안가 본관에 뛰어든 김재규는 정승화 육참총장을 자기 승용차에 태웠다. 김재규는 엄지손가락을 펴서 세우더니 가위표를 했다. "각하께서?" 정 총장은 순간 차지철의 소행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차는 세종로를 지나 삼일고가도로에 들어섰다. 질주하던 차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갈 것인가, 용산 육군본부로 갈 것인가? "병력 배치를 하려면 육본 벙커가 좋겠다"는 정 총장의 말을 김재규가 따랐다. '역사의 갈림길'이 된 삼일고가도로는 2003년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건설 33년 만에 모두 헐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④남산 중앙정보부
본관은 서울유스호스텔로 탈바꿈
김재규의 차가 용산행(行)을 택하면서 사태는 완전히 바뀌게 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차가 남산 정보부 건물로 가 지휘소를 차리고 정부 요인들을 소집했다면 손쉽게 사태를 장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며칠 뒤 작성한 진술조서에서 '현장은 중정 건물임을 주장하여 중정 직원으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하여 의도대로 처리한 다음 본인이 시해했다는 사실을 은닉하거나 노출시킬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남산 중정 본관은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탈바꿈했다. 지하취조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 건물은 서울시 남산별관, 중정부장 관저는 문학의 집으로 쓰이고 있다. 이들 건물은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에 따라 철거 계획을 밝힘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⑤육군본부
1994년 전쟁기념관 문 열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8시간 동안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밤 9시 30분, 육군본부 벙커 총장실에 모인 최규하(崔圭夏) 총리와 각료 앞에서 김재규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장관들은 "서거 사유를 대라"며 반발했다. 11시30분, 김계원 실장에게서 "김재규가 범인"이란 말을 들은 정승화 총장은 김진기(金晉基) 헌병감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보안사 오일랑(吳一郞) 중령 등에 의해 체포된 김재규는 보안사 참모장의 승용차에 태워졌다. 육군본부는 지금의 국방부 건물 건너편에 있었다. 1983년부터 '6·20 계획'이란 암호명으로 충남 계룡시에 육·해·공 3군 통합기지 건설이 추진됐고, 육군본부는 1989년 계룡대로 옮겨갔다. 이 자리에는 1994년 전쟁역사와 6·25 등에 관한 전시실을 갖춘 전쟁기념관이 개관했다.
⑥보안사 서빙고 분실
2004년 기무사직원 아파트 들어서
정동 보안사 분실로 가던 김재규 호송차는 운전병의 실수로 그 옆 정보부 분실 앞에 섰다. 앞으로 나오는 경비병을 보고 김재규는 반가운 듯 "우리 분실이구만"이라고 했다. 오 중령은 황급히 차를 돌리게 했다. 김재규를 태워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가던 버스는 중간에 전복사고도 한 차례 났다.
27일 새벽 2시 30분, 김재규가 서빙고 분실로 도착한 뒤부터 그의 '굴욕'이 시작됐다. 6개월 전 자신이 상을 준 보안사 수사관으로부터 30분 동안 두들겨 맞았다. 심문 과정에서 전기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김재규가 '거칠게' 당한 보안사 서빙고 분실 역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식 명칭은 보안사 대공처 6과지만 '서빙고 호텔'로 더 유명했다.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중요 거점으로 쓰이다가 헐린 뒤 2004년 기무사 직원 아파트가 들어섰다.
⑦신당동 박 전 대통령 집
가옥 인근 주택 재개발 사업 한창
1958년 제7사단장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들인 서울 중구 신당동 가옥은 지난해 10월 등록문화재 제412호가 됐다. 10·26 이후에는 유족들이 살았던 이곳은 현재 재단법인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1978년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는 한 주민은 "10·26 이전에는 앞 건물에 경호원이 상주(常駐)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관심 갖는 이도 드물다"고 말했다. 박정희 가옥 인근에서는 신당 6구역, 7구역 등 주택 재개발 사업이 한창이다.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일 날이 머지 않았다.
⑧보문동 김재규 집
창고·주택으로 쓰이는 4층 건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2기)인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이 5사단장으로 있을 때 휘하의 36연대장을 지냈다. 5·16 이후 준장으로 진급해 3군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 김재규에게는 '내란 목적의 살인죄'가 적용됐고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김재규가 수감됐던 '남한산성 군 교도소' 자리에는 현재 국군체육부대가 들어서 있고, 당시 사형장이 있었던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는 독립공원으로 바뀌었다.
10·26 당시 김재규가 살던 서울 성북구 보문동 집의 모습 역시 찾을 수 없다. 도자기와 고서화 등이 많았고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는 양옥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4층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창고와 주택 등으로 쓰이고 있다. 입구에는 건물 3층에 철학관이 있다는 광고 간판도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