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편대장의 훈령은 달랐다. "각 기는 내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대원들은 사찰 주변 능선을 향해 기관총 공격만 해댔다. 미군 정찰기에서 독촉이 빗발쳤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뭐하고 있나." 김영환은 못 들은 척 다시 지시했다. "각 기는 폭탄 공격하지 말라." 대원들은 해인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인민군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김영환의 용기있는 결정 덕에 해인사 팔만대장경(국보 32호)과 장경판전(52호)은 전화(戰火) 속에 살아남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됐다. 전쟁 와중의 문화재란 광풍 앞 촛불 같은 운명이지만 지휘관의 현명한 판단으로 기적처럼 살아남는 경우가 있다.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은 남부군 근거지인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했다. 그는 각황전(국보 67호) 문짝을 뜯어내 불태우고는 "문짝을 태우는 것도 태우는 것이니 명령을 이행한 것"이라며 돌아갔다.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인물이기도 했던 김영환 대령은 1954년 장군으로 진급한 직후 비행 중 악천후로 순직했다. 해인사는 법보(法寶)를 지켜낸 김 장군의 공을 기려 오늘 '고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재(齋)'를 연다. 김영환 장군과 차일혁 총경 같은 이가 있어 오늘 우리가 국보급 문화재들을 누리고 있다. 문화훈장을 추서해도 모자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