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자전거가 좀 별나다. '안장이 굉장히 낮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앉았다가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자전거쯤이야' 하고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다른 일행은 벌써 저만치 내려가는데 맨 뒤에 나 혼자 남아 있다. 일어나서 유심히 살펴보니 아하 이게 안장이 아니다. 가방을 얹는 짐받이에 앉으려고 했으니 주위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그린덴발트 산록의 초원을 따라 달리는 트로티바이크. 알프스의 풍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값진 체험이다. | |
야생마를 길들인 카우보이처럼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펴고 옆을 둘러본다. 드넓은 산록에 온통 초록의 융단이 깔려 있다. 한 뼘 정도 되는 풀과 잔디가 빈틈없이 촘촘히 자란다. 그 가운데로 좁다란 외줄기 길이 초원의 가르마처럼 선명하게 뻗어 내린다. 유유히 앞서 내려가고 있는 한국 아가씨들은 영락없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다. 그 옆 풀밭에서는 소 대여섯 마리가 워낭 소리를 울리며 어슬렁거리거나 누운 채 풀을 뜯는다. 전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숲이 나타난다. 전나무 숲은 낮게 깔리는 풍경 군데군데 솟아 한껏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자전거를 세워 풀밭에 누이고 카메라를 꺼내 든다. 초원 왼쪽에 병풍처럼 치솟은 벼랑과 설산이 함께 파인더 안에 들어온다.
베터호른·크린넨호른·메텐베르그·쉬렉호른….
거대한 벽과 날카로운 첨봉들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솟아 있다. 한없이 평화로워 단조로울 것도 같은 산록에 긴장감이 넘쳐난다. 바람 따라 구름을 휘날리는 알프스의 고봉들은 꼭대기에 흰 눈을 이고, 계곡에는 빙하를 늘어뜨리고 있다. 저 높은 곳은 언제나 겨울이다. 그린덴발트의 너른 골짜기에는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이 함께 머문다.
알프스의 설산 사이에는 수시로 패러글라이더가 유유히 떠다닌다. 스릴을 즐기는 여행객이라면 꼭 도전해 볼 만한 모험. | |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패러글라이더는 은빛 산정 아래 그린덴발트의 허공을 지나 맞은편 벼랑으로 다가간다. 패러글라이더가 서서히 착륙할 때쯤 덩달아 들떴던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제야 훌쩍 흘러간 시간이 생각난다. 그린덴발트에서 떠나는 기차를 놓칠 것 같은 예감이 와락 든다. 서둘러 자전거를 몰고 달리기 시작한다. 핸들이 비틀거리면서 자전거가 넘어질 듯 위태롭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다. 빨리 케이블카 역까지 가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기차역까지 뛰어가야 한다.
이마에 땀이 솟을 때쯤 나타난 마을 한복판으로 길이 이어진다. 거의 다 왔나 보다 하고 한숨 돌리려는 판에 일행 둘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삼거리라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게 아닌가. 참 난감하다. 좌우로 나뉘는 두 길의 폭이 똑같고 내리막의 정도도 비슷하다. 한적한 마을이라 오가는 사람마저 하나 없다.
일 초가 급한데 엉뚱한 곳으로 빠질까 봐 아무 쪽으로 갈 수가 없다. 그때 오른쪽 골목에서 꽤 연로한 할아버지가 보인다.
"익스큐즈 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짜고짜 케이블카 역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이 길입니까, 저 길입니까" 하며 손짓을 하는데 돌아오는 답이 간단치가 않다.
"왼쪽 모퉁이를 돌아서 몇 미터쯤 내려가면 큰 건물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어 계속 직진하여 빨간 건물이 맞은편에 보일 때 곧장 내려가지 말고 다시 오른쪽으로…"
뭐 그런 얘기 같은데 할아버지의 말은 쉼표도 없이 이어진다. 스위스인은 퉁명스럽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돌연변이의 친절 유전자를 타고난 것일까. 귓가에는 할아버지의 얘기가 아니라 칼 같은 스위스 타임에 맞춰 도착하는 기차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린다. 그렇다고 싹둑 말을 자를 수가 없다.
"이 동네에서 제일 외로운 분에게 말을 시켰네요!"
뒤에서 보고 있던 일행이 다급한 처지도 잊고 키득거린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더 꾸물댈 수가 없어 왼쪽이 맞느냐고 손을 가리키며 '예, 아니오'의 질문을 다시 던진다. 할아버지가 끄덕이는 순간 ‘이때다!’ 하고 땡큐를 외치며 곧바로 몸을 돌려 자전거를 힘껏 굴린다.
800m의 거리를 45초 만에 ‘순간이동’ 하는 피르스트 플라이어. 새가 하늘을 나는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 |
자연의 풍경이 그림 같다고 그곳 삶의 풍경도 그림 같다는 보장은 없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경치에 취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곳의 삶이든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다시 알프스의 산자락에 온다면 더 많이, 더 오래 걸어 그 풍경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
그린덴발트=글·사진 배두일 기자
그린덴발트 여행 TIP
▶트로티바이크:=일반 자전거처럼 오른쪽 브레이크를 잡아야 뒷바퀴가 제동되어 안전하다. 앞바퀴와 연결된 왼쪽 브레이크를 잡으면 자전거가 전복될 수 있으니 조심. 보어트에서 그린덴발트까지 자전거로 30분쯤 걸린다. 그러나 사진을 찍다 보면 늦어지니 시간을 더 넉넉히 잡는 게 좋다. 그린덴발트에서 보어트까지 올라가는 곤돌라 티켓과 자전거 대여 패키지가 30프랑. 자전거만 빌리는 것은 18프랑. 보증금 100프랑이나 신용카드를 맡긴 뒤 나중에 찾아야 한다.
▶피르스트=그린덴발트에서 곤돌라로 35분 걸리는 산마루. 2168m 고지의 벼랑 위에 멋진 산장이 있다. 스키어들을 수용하기 위한 대형 테라스 레스토랑과 숙소를 갖추고 있다. 음식 맛도 좋아 산상의 하룻밤을 만끽하기 안성맞춤. 저녁과 아침 식사를 포함하여 1인 1박에 85프랑.
▶플라이어= 피르스트에서 바로 아래 슈렉펠트 역까지 800m거리를 45초 만에 '순간 이동'하는 기구. 땅으로부터 45m 높이로 걸린 쇠줄에 달린 의자에 앉으면 쏜살같이 아래로 내리꽂힌다. 공중에서 시속 84km로 새처럼 나는 기분이 더없이 짜릿하다. 유럽에서 여기만 있는 스릴 만점의 플라이어. 25프랑.
▶바흐알프 호수= 대부분 피르스트에 오르는 첫째 이유가 바로 이 호수를 보러 가는 것. 2200m 높이에서 완만하게 굽어 도는 산길이 천상의 하이킹 코스다. 베터호른·슈렉호른·아이거·묀히·융프라우 등 알프스의 연봉을 바로 눈앞에, 그리고 등 뒤에 두고 걷는다. 봄·여름이면 에델바이스 등 야생화가 온 산을 덮는다. 길이 평탄하여 눈이 많은 겨울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80,600㎡의 커다란 호수에 알프스의 고봉들이 잠겨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모습은 사진가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왕복 6km에 2시간 안팎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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