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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누비기 ④] `말 못해요` 융프라우 사는 여인 칼같은 퇴짜

화이트보스 2009. 11. 30. 15:42

[알프스 누비기 ④] `말 못해요` 융프라우 사는 여인 칼같은 퇴짜 [조인스]

2009.11.23 10:11 입력 / 2009.11.23 18:52 수정

빙하처럼 차가운 한국인들의 `이념`

여행은 '다시 돌아옴'이다.

돌아올 때는 마음을 조금 비웠거나 아니면 조금 채운 상태다. 가끔은 '덜컥'하며 가슴에 금이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또한 여행의 묘미다.

라우터브루넨의 큰길을 벗어나보지도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 여전히 300m의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슈타우프바흐 폭포의 절벽에는 굴이 하나 뚫려 있을 것이다. 계단을 따라 굴 속에 들어가면 흩날리는 폭포수가 얼굴까지 적신다. 한국 노부인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간 빵집 테라스에 지금은 햇살이 슬쩍 발을 걸쳤다. 그 자리에서 오가는 여행객을 지켜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아이거와 묀히(오른쪽)의 고봉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아이거빙하. 꼼짝 않는 것 같지만 아주 조금씩 아래로 움직인다.
산뜻한 색깔의 집이 있어 간판을 보니 한국 여행객의 집합소로 유명한 밸리 호스텔(http://www.valleyhostel.ch)이다. 태극기가 걸려 있고 한글 안내문이 로비·방·화장실 등 곳곳에 붙어 있는 숙소다. 맞은편에서 100년 또는 200년 묵었을 샬레도 계속 눈길을 끈다. 그 2층 창가 침대에 앉으면 세월에 곰삭은 전나무 향이 커피 향처럼 감돌겠다. 밤이 되면 불을 밝히지 않아도 창문으로 빤히 보이는 융프라우·실버호른·브라이트호른 첨봉의 눈빛이 스며들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알프스를 몸으로 느낄 수 있으련만 빡빡한 일정의 여행객에겐 그저 '즐거운 상상'일 뿐이다.

1시간 남짓한 마을 산책을 마치고 역으로 향한다. 조그만 수퍼마켓이 눈에 띈다. 딱히 살 거리가 없는데도 불쑥 들어선다. 음료수·초콜릿·담배·건전지·신문·잡지 등이 좁은 공간에 빼곡히 진열돼 있다. 이리저리 둘레거리다가 카운터에 있는 동양인 아주머니에게 볼펜 있는 곳을 묻는다. 짧은 영어 문답 끝에 구석에 있는 진열대로 간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들어와 "뭘 사느냐"고 한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카운터 아주머니가 외친다.

라우터브루넨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첨탑의 교회(왼쪽). 그 앞뜰에는 주민들이 500여 년 전 이주할 때 들고온 종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한국 분들이세요?"

우리 둘은 동시에 그 녀를 쳐다본다. 아주머니는 중국인인 줄 알았다며 반색한다. 정작 그녀보다 놀란 것은 우리다. 여행객이 아닌 한국인 주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주머니는 알프스의 계곡, 라우터브루넨에 산 지 17년째라며 웃는다. 이곳 주민이 다 되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가게를 언제부터 운영했냐고 물으니 그 녀는 주인이 아니고 점원이란다. 아주머니의 집은 우리가 들러보고 온 계곡 안쪽에 있고, 이곳 남성과 결혼했다고.
얘기를 듣다 보니 놀라운 게 또 있다. 오랜 세월을 알프스에서 보냈는데도 말투가 서울 동네 수퍼의 아낙처럼 구수하다.

기차 시간이 다 됐다. 빙하의 냉기 같은 곡절, 융프라우 연봉의 만년설처럼 아련한 사연…. 그녀의 마음 구비에 걸려 있는 72개 폭포의 소리 하나하나가 절절할 터다. 더 들을 시간이 없다.

이름이라도 알아 놓고 싶었다.
"왜요?"
'아차' 싶어 그제야 취재차 여행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주머니는 어느 언론이냐고 묻더니 손사래를 친다.
"안 되겠어요. XXX라면 모를까."
가슴이 서늘해진다. 알프스의 한국인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거기까지다.

가파른 산기슭뿐만 아니라 오두막과 농가 바로 옆으로도 지나가는 융프라우 산악열차.
산악열차가 클라이네 샤이덱의 산록을 힘겹게 오르는 동안 내내 아주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17년 전이면 1992년이다. 93년 한국 땅에 비로소 문민정권이 들어섰다. 그 녀는 피가 끓는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군사정권 아래서 보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먼 이국으로 떠나와야 했으니 뼈아픈 곡절이 한둘일까.

그런 사정을 다 미루어 짐작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89년 여행 자유화 이후 20년이 지났다. 라우터브루넨은 이제 '한국인의 천국'이다. 새삼 국제화·글로벌화란 말을 꺼내기도 식상하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20년 전 '이념의 빙하 계곡'을 못 빠져나온 것은 아닐까.

500여 년 전 라우터브루넨에 이주하면서 들고 온 종, 주민들은 이제 그 종을 치지 않는다. 먼 남쪽 로첸에서 미지의 척박한 땅을 찾아오면서 방황하고 절망할 때마다 희망을 울려 주던 종이다. 그러나 험난한 여정 동안 떨어뜨리고 굴려서 상처 또한 많은 종이다.
그들은 새로운 종을 만들어 교회에 걸었다. 들고 갈 일이 없으니 좀 더 크고 멀리 울릴 수 있는 종이다. 힘든 시절 그들을 지켜 준 종을 버린 것은 아니다. 교회 앞뜰, 잘 보이는 곳에 작은 종각을 만들어 비 맞지 않게 모셔 두었다. 옛 종은 지금도 그들 마음 속에서 울린다. 삶의 좌표를 잃을 때면 종은 주민들에게 조상들의 초심을 들려 줄 것이다. 그 종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진실만을 알려 주는 '황금 나침반'과 마찬가지다.

기차가 융프라우로 향하며 오른쪽으로 산자락과 계곡 가득 산악빙하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큰 알레치 빙하가 있다. 2001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길이 23km, 최고 두께 900m, 폭 1.5km의 얼음 산맥이다. 바위 계곡에 박힌 그 만년빙은 요지부동 같지만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하루에 49cm씩, 일 년에 180m를 산 아래로 기어 내리고 맨 끝자락에서는 그만큼씩 녹는다. 라우터브루넨의 빙하수는 쯔바이뤼치넨에 이르러 오른쪽 그린덴발트 계곡에서 녹은 빙하수와 만난다. 두 물이 섞여 흘러 인터라켄의 명물 브리엔츠 호수를 이룬다. 이름 밝히기를 거절한 아주머니의 마음 속 빙하도 보이진 않지만 움직이고 있겠지.

드디어 융프라우 봉우리가 하늘 높이 모습을 드러낸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은빛 정상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념의 빙하 깊숙이 갇힌 것은 정작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마디에 기겁하여 온갖 상념에 빠졌으니.

라우터브루넨=글·사진 배두일 기자

알프스 겨울 여행 TIP

▶숙소= 스키를 타지 않을 경우 숙박 일정을 짜는 요령이 필요하다. 산장에 묵으려면 리프트가 있는 곳을 피한다. 산 아래라면 스키장이 있는 도시에서 멀수록 좋다. 스키 시즌(올해는12월 5일부터 내년 4월 11일까지)에는 밀려드는 스키어들로 열차마저 타기 힘들다.
▶난방= 산 위든 아래든 고지가 높아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별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밤새 웅크리고 추위에 떨기 십상. 숙소에 들어가면 무조건 난방 장치부터 찾아라. 산장에도 어디든 히터가 있지만 온도 조절 밸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보통 창문 쪽에 있는데 보이지 않게 된 곳이 많다. 물론 주인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

▶배낭= 여행용 가방 외에 작은 배낭을 꼭 챙기도록. 그 안에 여분의 겉옷이나 방풍의를 넣고 다닌다. 두툼한 옷 한 벌보다 좀 얇은 옷 두 벌이 낫다. 날씨에 따라 적절히 덧입고 벗기를 할 수 있다. 또 배낭에 물병을 넣고서 수시로 마시면 고소 적응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