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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란은 12척의 초대형유조선(VLCC)을 발주했다. 한국과 중국 기업이 막판 수주전을 벌였다. 두 나라 업체들이 제시한 가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12척 모두 중국 업체가 쓸어갔다. ‘선주에 배 값의 90%를 융자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한국 입찰 관계자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경제위기로 선박금융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선수금도 아닌 배 값(1척당 약 1억 달러)의 90%를 빌려주겠다니 말이다.
‘물주’는 중국수출입은행이었다. 국가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국책은행이다. 이 은행은 지난 4월 자국 조선업계에 1600억 위안(약 27조2000억원)을 지원키로 했고, 그중 일부가 이란 배 수주전에 사용됐다. 국가(정부)가 국유기업을 앞세워 시장에 직접 참여하는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의 전형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체들은 결국 중국 정부의 자금력에 밀려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던 셈이다.
이번 경제위기를 계기로 중국 국유기업의 힘은 더 커지고,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했다. 경기회복을 위해 푼 돈이 국유기업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실 국유기업인 산둥(山東)철강이 우량 민영기업인 르자오(日照)철강을 인수하기도 했다. 올해 철강·항공 등 주요 산업에 등장한 ‘국진민퇴(國進民退·국유기업이 득세하고 민영기업은 쇠퇴한다)’의 한 예다. 민영기업은 산업 구조조정 명목으로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재(再)국유화’ 정책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실탄(돈)으로 무장한 중국 국유기업들은 해외 시장에서도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이 똘똘 뭉쳐 해외 자원을 쓸어 담고, 외국 경쟁 업체를 밀쳐낸다. 이란 선박 수주전은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타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입찰 과정을 지켜본 한 업계 관계자는 “우리가 상대한 것은 중국 기업이 아닌 국가였다”고 말한다. ‘공포를 느낀다’고도 했다.
철강·자동차·자원개발, 심지어 정보기술(IT)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기업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시장 쟁탈전을 벌여야 할 판이다. 2조 달러의 돈주머니(외환보유액)를 찬 중국 정부를 상대해야 하기에 버거운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 경제를 엄습하고 있다.
중국의 ‘국진민퇴’를 돌파하는 길은 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의 민간기업 지원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기업이 마음껏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를 정부·기업·학계가 똘똘 뭉친 거대한 연구개발(R&D)센터로 만들자’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